설교문

추수때까지… 내버려 두어라.

본문

Celeb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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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을 지나고 있습니다. 더운 여름 건강하게 보내고, 더위에 지치지 않고 우리의 일상을 잘 살아내는 맑은물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같이 무더운 날 함께 모여서 예배할 수 있는 시원한 공간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먼 곳까지 달려와서 함께 찬양하고 예배하며 삶을 나누는 맑은물 가족이 있어 좋고 감사합니다.

우리는 종종 말합니다. “귀신은 뭐하나 저 놈 안잡아가고!!!” 악한 사람을 볼 때, 악한 사람이 빨리 사라졌으면 하는 바램이 그 이야기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으려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합리적인 질서를 찾고 정의롭고 공의로운 세상을 갈망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은 그 대답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조리하고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합니다. 악한 사람이 있고, 악한 사람이 더 잘살고 형통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질문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세상은 이 모양입니까? 왜 정직한 사람이 손해보고 살아야 합니까? 교회 안에서 조차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왜 이런 고통이 존재하나요?와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예수님은 어쩌면 그 대답을 우리에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가라지가 어디에서 왔습니까?”
“다 뽑으까요?”라는 주인의 종들의 질문은 어쩌면 우리가 방금 전 세상의 고통과 악에 대한 질문일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종들의 질문에 뭔가 속시원한 답이기보다는 악과 고통이 공존하는 세상 가운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와 같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종들의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답들을 살펴보면서 오늘 본문의 의미를 함께 살펴봅시다. 

가라지는 어디서부터 왔을까?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며 예수님은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주인이 좋은 씨를 밭에다 뿌렸습니다. 지난주 살펴보았던 비유는 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오늘 비유는 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밀씨가 점점 자라서 줄기가 나고 열매를 맺을 때즘 보니깐 가라지도 보였습니다. 여기 가라지로 번역된 단어는 독보리입니다. 독보리는 성장 초기에는 밀과 거의 구별되지 않을 만큼 닮았습니다. 이삭이 되고 열매를 맺을 즈음에야 씨가 검고 작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아마도 밀과 구별되게 나타나는 시기가 된 시점인 것 같습니다. 열매를 맺을 시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 가라지였습니다.

종들은 묻습니다. 분명히 주인이 좋은 씨를 뿌렸는데 이 가라지(독보리)은 어디서 왔을까? 오늘 우리가 묻는 질문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선하게 창조된 이 땅에 어디서 악이 왔을까? 그 악으로 인한 고통이 왜 존재하는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가라지와 같은 이질적인 악과 고통이 어디에서 왜 생겼는지 묻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25절에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원수가 와서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밀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가라지는 주인이 뿌린 것이 아니고 원수가 뿌린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는 밤에 몰래 은밀하게 뿌리고 갑니다. 
악은 하나님의 창조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악은 기생적이고 이차적이며 은밀합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어떤 물질이나 힘이 아닙니다. 대신 선한 것이 망가지고 왜곡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기생적이고 이차적이고 은밀한 것입니다. 
빛이 사라진 상태가 어둠이고, 철이 부식된 것이 녹인 것처럼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하기 보다 하나님의 의도하신 ‘선’이 결핍되거나 부패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창세기에서 보듯이 선하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세계에서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왜곡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했던 이야기에서 악의 기원이 나타납니다.

종들은 가라지로 인해 마음이 어려워서 주인에게 묻지만 주인의 대답은 덤덤합니다. 
아주 무심하게 어~ 그래? 가라지가 났네! 원수가 그랬어! 밤에 몰래 뿌리고 갔어!
주인은 급하지도 않고 놀래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내가 좋은 씨를 뿌렸는데 가라지가 날 수 있냐며 당황해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냥!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냥! 가라지가 났네! 원수가 그랬네!하며 대답합니다.

가라지에 대한 종들의 반응과 주인의 반응이 다릅니다. 주인의 이 태연한 반응은 의외입니다. 주인의 이 무심한 반응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우리가 성서일과에서 함께 읽은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시작이요, 마감이다. 나 밖에 다른 신이 없다.” 시작-파종과 마감-추수를 한 손에 쥐고 계신분이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습니다. 파종과 추수 사이에 벌어진 가라지사태는 혼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고 통제하고 계십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악과 고통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손 놓고 계시거나 방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의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는 떨지 말아라. 겁내지 말아라”
가라지가 떨어진 밭을 보며 당황해하는 종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악을 마주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의도했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고, 반복되는 실패와 낙담되는 상황에서 모든 상황을 뛰어넘어 통치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있으니 떨지 말고, 겁내지 말고, 주저 앉지 말고 묵묵히 현재의 삶을 살아내라는 도전입니다.

악이 공존하는 세상의 현실을 로마서에서는 ‘해산의 고통’으로 읽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이미와 아직을 사는 중간기에 사는 어중간함, 부대낌,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악으로 인한 고통과 괴로움은 장차 받을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악의 이유와 왜 나에게 이른 고통이 주어졌는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반드시 추수때가 있고, 악으로 인한 고통은 이유없는 고통이 아니라 해산의 고통, 생명을 낳는 고통, 영광을 입는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자라고 도전합니다.

하나님나라의 이미와 아직을 사는 우리에게 부대낌이 있습니다. 일은 바라는 대로 풀리지 않습니다. 이유없는 삶의 어려움과 고통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평화를 간구하지만 전쟁은 끝이 없고, 국민주권정부가 들어섰지만 정치적인 상황은 혼란스럽고 경제적인 상황은 제자리 걸음입니다. 북한의 두국가 선언으로 인해 분단된 조국의 상황은 더 경색되고 어려워졌습니다.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을 바라지만 여전히 정직한 사람은 손해보고 부정직하고 약삭빠른 사람이 잘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길 소망하고 기대하는 가운데 신음하고 애씀이 있습니다.

원수가 밤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네!라는 주인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두려워하지도 말고 겁내며 떨지도 맙시다. 악이 존재하고 고통스러운 세상을 살지만 선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악이 아무리 크게 보여도, 고통이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답답함과 신음과 부대낌을 하나님 앞에 가져갑시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눈을 열어달라고, 하나님의 호흡으로 호흡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하나님과 함께 길을 걷는 걸음을 걷게 해달라고 구합시다. 시편의 시인이 노래하듯이 “야훼여! 당신의 길을 나에게 가르치소서!”라고 노래하며 하나님의 길을 걷고 마음 한데 모두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가라지 뽑으까요?

드러난 가라지를 보고 종들이 주인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마음이고 제안입니다. 선한 마음입니다. 주인의 밭을 아끼고 같이 자라는 밀이 제대로 자라려면 가라지를 제거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악을 대면하거나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한 상황을 만나거나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반응들입니다. 열받고 분노하고 상황을 바꾸거나 사람을 고치려하거나 복수하려고 합니다. 이런 반응들은 선을 향한 열망때문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대답이 의외입니다. 그리고 단호 합니다. 
“아니다!” 뽑지마라고 합니다. 추수때까지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내버려 두다니요? 불의 앞에 눈감으라는 말인가요? 오해하지 맙시다. '내버려 두어라'는 불의 앞에 눈감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전의 상을 엎으신 분이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내려놓는 것은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판결봉이지, 악한 일에 대한 분별과 저항이 아닙니다. 잘못된 일에는 목소리를 내되, 사람을 폐기 처분하는 심판자의 자리에는 앉지 않는 것 — 그것이 이 비유의 균형입니다.


아니! 당장에 악으로 인해 고통스럽고 괴로운데 악을 제거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왜 내버려 둡니까? 우리가 받는 고통과 어려움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라고 질문이 쏟아질 것 같습니다. 부대끼는 상황이 오래되고 답답하고 지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가라지를 제거하다가 밀까지 다치고 제거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라지와 밀이 자랄 때는 거의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팬 뒤에야 정체가 드러나는데 그때에는 뿌리가 서로 엉켜 있기에 가라지를 뽑으면 반드시 밀이 같이 뽑힙니다. 심판의 지연과 연기는 무능이나 관심없음이 아니라 밀을 지키려는 사랑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지연되고 더디게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의 무관심이나 무능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성급한 심판이 하나님의 백성까지 다치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지연되고 늦춰집니다.

다 뽑으까요?라는 종들의 물음에 주인의 대답에 나온 내버려두어라라는 어원을 살피면 용서하다라는 단어로 자주 쓰이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준 것 같이”에 사용된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은 용서의 유예, 회개의 문을 열어두시는 오래 참으심입니다.


베드로후서 3:8-9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더디 화를 내시고, 오래참으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가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교회사 안에도 악을 제거하는 가라지 제거방식들이 존재했습니다. 열심당원은 칼과 혁명을 통해 로마로부터 독립을 얻기를 바랬고, 쿰란 공동체는 세상과 분리되어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었고, 바리새파는 철저하게 분리하고 경계를 짓는 방식으로 악을 제거하고 정결해지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열심당원은 로마의 칼에 의해 멸망당했고, 쿰란공동체는 세상이라는 밭을 떠나 광야에서 고립되었다가 결국 역사에서 사라졌고, 바리새파는 예수님으로부터 자기 스스로 속이는 자요 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책망받았고 생명을 잃고 사람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심판은 제한적이고 온전하지 못하기에 늘 실패로 드러나고 맙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다고 해서, 지금의 상황이 억울하고 고통스럽다고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우리 스스로 심판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심판자가 되는 순간 우리 또한 역사 안에서 보여주었던 것 처럼 자비를 잃고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스스로 가라지를 뽑겠다고 달려드는 사람들은 결국 가장 많은 밀을 뽑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지연된 심판의 자리와 시간은 하나님의 의도된 자비의 자리와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지금 이 자리에 누가 앉아 있을 수 있으며 누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더디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심판, 지연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심판자가 되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다리고 인내하는 삶을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결말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나라의 이미와 아직을 사는 부대낌의 삶을 사는 것은 알겠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악을 제거하는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리고 심판의 유예는 하나님의 의도된 자비하심이라는 것도 알겠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입니까?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이 생길법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질문의 답을 집에서 따로 모였을 때 설명해주십니다.

추수때가 올 것이다. 추수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가라지는 모아다가 불에 태워 버리듯이 세상의 끝 날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인자가 천사들을 보내어 죄짓게 하는 모든 일들과 불법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모조리 끌어모아다가 불 아궁이에 쳐 넣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심판은 단호하게 분명하게 그리고 온전하게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도 심판의 주체는 하나님과 천사들이지 종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심판의 주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고통이 악이 영원히 존속되지 않고 반드시 끝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의 형벌을 받는 삶이 아닙니다. 돌을 굴려 산 정상에 올리면 다시 굴러떨어지고 그것을 다시 정상으로 밀고 올라가는 끝없는 고행의 연속이 아닙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 시작과 끝을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통치하십니다. 
악과 더불어 사는 것, 그리고 악으로 인한 고통을 감내하며 사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무의미하고 허무한 삶의 연속이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해산의 수고라고 표현했듯이 우리는 생명을 낳고 생명을 얻는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맛보는 과정에 있습니다. 
해산의 고통을 통과한 어머니에게 아기를 처음 안는 기쁨이 있습니다. 
숨을 참고 허벅지 통증을 이겨내며 오른 사람에게 산 정상의 바람이 있습니다. 
고통을 통과한 자만이 아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니 더딘 하나님나라의 완성과 지연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악을 대면하고 고통을 마주하는 일에 이상히 여기거나 절망하거나 분노하여 중심을 잃지 맙시다. 그 안에 깃듯 하나님의 의도된 자비를 기억하고, 오래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법을 배워갑시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 마지막에는 독특한 표현이 나옵니다. 
인자라는 단어와 “의인들이 해같이 빛날 것이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성경을 읽어오신분은 어디서 본듯한 표현인데 할 것입니다. 네 바로 다니엘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다니엘서는 어떤 책입니까? 바벨론 포로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루는 책입니다. 제국의 압제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을 기다리고 어떻게 인내하며 살 것인가를 이야기해줍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비유를 마무리하면서 다니엘서의 그림으로 이 비유를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지연된 하나님의 심판과 더디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의 완성으로 인해 부대끼고 힘든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고 견뎌낸 이들이 하늘의 해처럼 빛나는 영광을 마주할 것이라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도전합니다.

이유없는 견딤과 오래참음이 아닙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지금 겪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게 될 영광된 자유는 참고 견디고 인내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심판의 자리에서 내려옵시다. 
끝없이 기다리며 용서하시는 그 하나님의 일에 참여합시다. 
지금 내가 겪는 고통과 어려움과 한계 속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길을 걷는 법을 배웁시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의 오시는 날 해 같이 빛날 나와 서로를 소망하며 오늘을 참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