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가야할 길

설교

2026. 8. 29.

가야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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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뒤바뀐 분위기

오늘 함께 나누는 말씀은 지난주에 묵상한 본문이 바로이어지는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답하는 놀라운 고백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도 이 고백을 칭찬하시고 이 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정말 귀하고 가슴 뛰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그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뀝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말씀하시고 베드로는 말리고, 말리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라는 심한 말을 듣습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교회의 기초가 되는 ‘반석’이라고 불리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길을 막는 ‘걸림돌’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이런 일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로, 의미로 다가올까요? 

베드로의 걸림돌

오늘의 이야기는 21절 “그때부터…”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에 딱 두번 나타나는데 마태복음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나타낼 때 사용했습니다.

첫번째는 마태복음 4:17에 나타납니다. 
“그때부터 예수께서 전파하기 시작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두번째로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이전까지 예수님이 누구인지? 메시야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것이 전반부의 이야기였다면 오늘본문부터 예수님이 어떤 메시야인지? 메시야의 길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밝히신 내용은 세가지입니다. 
1. 예루살렘에 가야한다. 
2.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 
3.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 
베드로의 고백시점 이후부터 예수님은 계속해서 십자가의 길을 말씀하시고 드러내십니다. 고난받는 메시야, 죽임당하는 메시야, 그리고 다시 부활하는 메시야를 가르치시고 드러내십니다.

베드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좋으나 예루살렘에서 왕좌에 앉는 것이 아니라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은 베드로에게 걸림돌이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 귀에는 두번째까지만 들렸을것 같습니다. 그는 여기서 더 진도를 못나가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데 그 뒤에 오는 부활은 상상도 못합니다. 아니 그의 귀에는 두번째에서 멈추었습니다. 한국사람의 말은 끝까지 들어야 안다고 하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이 세번째 이야기하신 것은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살다가 충격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을 접하면, 그 뒤에 오는 약속과 소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겪는 어려움이 크게 보이기에 어려움을 통해 일하시는, 어려움 뒤에 오는 일들을 보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고난받는 메시야, 죽임 당하는 메시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두려움과 당혹감이 컸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이야기에 갇혀서 그 뒤에 이어오는 부활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걸림돌이 된 베드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은 베드로는 아니 제자들 전부는 모두 얼어붙었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이라는 선언을 하십니다. 베드로의 당혹감, 제자들의 어이없음과 배신감 그들의 마음을 한번 상상해봅시다. 함께 산전수전을 다 겪고 여기까지 왔는데, 원래 기대했던 것과 정반대의 결말을 이야기하는 스승 앞에서 그들의 얼굴의 표정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멀리 가이사랴 빌립보까지 와서 자신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듣고 한다는 이야기가 곧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제자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한동안 말을 잊었던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예수께 대들었다.

예수님의 멱살이라도 잡았을까요? 새번역은 대들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안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며 예수님께 대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왜 이렇게까지 예수님 앞을 막아서며 안된다고 절대로 안된다고 말렸을까요?

아직까지 십자가의 역설을 몰랐을테지요.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오는 부활의 영광을 볼 수 없었습니다. 메시야가 죽는다는 것은 신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받고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사랑하는 스승이 죽음의 길을 간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고통과 죽음은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예수님에게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은 돌아서서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베드로의 사랑이 담긴 만류와 반대에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3연타를 얻어 맞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베드로에게는 충격이었겠지요. 어떻게 예수님이 나에게 이런 심한 말을… 표현을… 할 수 있을까?

히브리어에서 사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길을 막아서서 대적하는 자’라는 보통명사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인격을 판단하신 것이 아니라 막아서고 걸려넘어지게 하는 그 일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베드로의 반대와 만류는 십자가 없는 메시야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시험받으실 때에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절하라고 사탄은 시험했습니다. 고통없이, 십자가 없이, 메시야의 길. 구원을 성취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대답은 “물러가라. 사탄아!”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말에서 광야에서 들으셨던 그 목소리를 알아들으셨습니다.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의 입을 통해 들려오는 유혹의 말들… 
사랑과 염려와 배려의 동기로 찾아오는 유혹…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의 애정어린 반대와 만류를 단호하게, 심할정도로 꾸짖으시며 거절하십니다. 이것은 사람의 일을 생각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교회의 기초가 되는 반석이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메시야의 길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어버렸습니다. 베드로가 악해진 것도 아니었지만 베드로의 위치, 돌의 위치에 따라 기초가 되었다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참 무서운 경고입니다. 가장 귀한 고백을 했던 사람이 걸림돌이 되고 방해가 됩니다. 누구나 그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섯다고 생각할 때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성경의 말씀도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면 결국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순수한 동기와 합리적인 이유와 책임감과 풍부한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나 행동일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혜와 동기와 사랑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아버지의 뜻과 나라를 먼저 구하고 있고, 우리의 존재와 삶이 하나님과 조율되기를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대신에, 우리가 상상하는 예수님의 길을 강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 교회로 함께 모이고 살아가는 것, 등에서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내가 선호하고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에 맞추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를 막아섭니다. 
자녀가 안정적인 삶을 살길 원하기 때문에 주님이 주시는 소명을 따라 고되고 희생이 따라는 길을 가려할 때 부모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막아섭니다. 사랑하는 친구가 후배가 배우자가 손해보는 결정을 하고, 정직한 결단을 내리려 할 때, 현실적인 염려로 말립니다.

그러나 오늘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의 상식적인 사랑과 염려가 혹시 사랑하는 이의 부르심과 예수 따름의 길을 막아서는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혹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배려와 책임과 합리적이고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닌가?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단어는 단순히 머리로 계산하는 것을 넘어서서 마음과 시선이 전적으로 향해 있는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 중심이 하나님의 뜻과 나라에 맞추어져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고난뒤에 오는 부활의 영광을 볼줄아는 시야가 열리길 바랍니다. 때론 힘겹고, 부담스럽고, 손해보는 일들 일지라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와 그 길을 가려는 이들의 걸음을 축복할 수 있는 맑은물 가족의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베드로가 서 있어야 할 자리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서서, 예수님이 가시려는 길을 막고, 자신이 예수님의 길을 재조정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 이 길은 안됩니다.”하며 가이드 하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 앞에서 길을 막아서고 길을 바꾸려 했던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뒤로 물러서라”
“베드로야! 너는 지금 너의 위치를 벗어나 내 앞을 막아서고 있구나. 나의 길을 바꾸려 하는구나! 네 자리는 내 앞에 아니다. 내 뒤다. 다시 내 뒤에 서라.”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은 뒤이어 나오는 24절에 “나를 따라오려거든…”라는 말과 같은 단어 같은 어순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정확히 같은 표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제자의 자리는 스승의 앞이 아니라 스승의 뒤입니다. 
제자는 듣고 따르는 자리이지 스승을 조정하거나 막아서는 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자리를 재조정해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자리는 예수님의 길을 막아서는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비록 아끼고 사랑하고 보호하고 합리적인 것이어도 예수님의 뒤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뜻보다 나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이 앞선다면 그것은 우상이됩니다. 
성령의 소욕보다 육체의 소욕을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육체의 열매를 맺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지 가지에 나무를 붙이려면 가지는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순수한 동기와 사랑을 가지고 출발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보다 내 생각과 감정과 욕망을 앞에 두는 순간,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길을 막아서는 하나님을 일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일상의 자리에서 나의 자리, 우리의 위치를 생각해봅시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로 함께 모일 때에 나는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내 사랑이 앞서거나, 내 이익과 상식이 앞서거나, 내 열심과 책임이 앞서기보다 묵묵히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겸손과 순종의 삶이 우리의 몸에 삶에 묻어나오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고 엎드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와 세상을 예배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날마다 나의 자리, 우리의 위치를 재조정하며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삶이길 바랍니다. 

베드로와 제자의 길

베드로가 대표적으로 예수님의 길을 막아섰지만 함께 있었던 제자들도 모두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나서지 않았을 뿐이지 예수님의 길을 알지 못했고, 고난 받고 죽임 당하는 메시야의 역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무지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영광의 메시야를 기대하고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은 영광의 메시야가 아니라 고난받고 죽임당하는 메시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의 길은 영광을 얻고 안락한 삶을 보장받는 길이 아니라
고난받고 죽임당하는 메시야의 길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본 회퍼가 ‘나를 따르라’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은 나와 함께 십자가를 지자. 나와 함께 죽자라는 말이다라는 뜻으로 말했습니다. 이 제자의 길은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요 죽음의 길입니다.

처음부터 말씀해주시지!!! 3년이 다되어가는 이시점에!!! 이제야!!! 예수님이 본색을 드러내십니다. 미리 이야기했다면 좀 더 생각해봤을텐데… 미리 이럴줄 알았으면 따라나서지 않았을텐데…

예수님의 공생애 정점에 이르러서… 이제 곧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 갈텐데… 
이제야 예수님이 제자의 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에게 자신의 뒤로 물러서라고 말씀하시고서는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를 혐오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열등하게 여기고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부인은 자기 학대나 착취가 아닙니다. 부당한 폭력과 억압에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죄된 본성을 벗고 참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목숨을 얻으려 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자는 목숨을 얻을 것이다. 
온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 놓을 수 있느냐?”

겉으로 보기에는 자기부인의 삶, 십자가를 지는 삶은 목숨을 잃는 삶인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부인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승승장구하고 온천하를 얻고 안락하고 부요한 삶 같지만 결국에는 생명을 잃는 삶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인자가 고난받고 십자가를 지고 죽임을 당하지만 부활의 영광의 몸을 입고 다시 올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고난 받는 것 같지만, 죽임당하는 것 같지만, 실패하는 것 같지만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뒤 따름으로 생명을 얻고, 부활의 영광을 누리고, 하나님나라의 부요함에 참여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 역설적인 십자가의 길을 알지못했고, 이해하지 못했고, 무지했던 것 처럼 우리 또한 알지 못하고 무지합니다. 
자아를 숭배하는 문화에 살면서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길은 악하고 혐오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자아를 확대하고, 자아를 보호하고, 자아를 증명하는 사회에 살면서 우리의 자아는 더 초라하고, 불안하고, 피로한 속에 삽니다. 
자아를 부풀리고 스펙을 쌓아 올려 나를 증명하려 할 수록 우리의 자아는 더 허기집니다. 자아를 보호하려 쉽게 손절하지만 더큰 고독과 외로움이 밀려옵니다. 자아를 얻으려 할 수록 자아를 잃어가는 사회를 삽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나 스스로 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하는 자기중심의 그 강박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하나님께 내 자아의 닻을 내려 놓는 삶입니다. 자아를 하나님께 내려 놓으면 참된 자아를 얻습니다. 자기중심성의 생명을 내려 놓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당시 갈릴리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십자가는 은유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 유대 전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면서 로마의 총독 바루스가 약 2,000명을 십자가에서 처형했다고 전합니다. 진압의 중심지였던 세포리스는 나사렛에서 약 6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제국의 폭력 앞에 무기력하게 수치스럽고 공포스럽게 죽어가야 했던 기억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로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십자가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로마로 대표되는 세상의 질서에 반해서, 반역의 길을 간다는 뜻이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은 결코 “내 삶의 짐”이나 “참아야 할 고통”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세상의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간다는 것이고 때로는 가장 수치스럽고 모든 권리를 박탈 당하는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로마 제국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폭력과 공포로 주어지는 로마의 평화를 폭로하고 자기희생과 사랑과 순종으로 주어지는 하나님나라의 길을 여셨습니다.

십자가는 수치이고, 박탈이고, 공포이고, 죽음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영광이고, 부요이고, 기쁨이고, 생명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으면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얻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세상의 거짓과, 폭력과, 불의를 고발하고 폭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 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은 세상에 생명과 기쁨과 평화의 선물을 가져옵니다.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운 십자가의 길은 참된 생명과 기쁨과 평화를 가져오는 역설적인 길입니다. 

이 역설은 우리가 이해한 다음에 걸어가는 길이 아닙니다. 이해되지 않는 채로 걸어가는 길입니다.

제자들은 끝내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도 누가 크냐를 다투었고, 겟세마네에서는 잠들었고, 결국 다 도망쳤습니다. 3년을 따라다니고도 그랬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다 알아들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베드로의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깨달아야 할 교훈이 아닙니다. 져야 할 짐입니다.
그리고 그 짐이 어떤 것인지, 예수님은 조금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목숨을 얻으려 하면 잃습니다. 지키려고 움켜쥔 그 손 안에서 그것이 썩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붙들고 있는 것들을 생각해 봅시다. 자존심, 인정, 안전, 관계에서의 우위, 옳았다는 확인. 하나도 나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지키느라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온 세상을 얻어도 자기를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온 세상을 손에 쥐고 있지만 자신을 잃어버리고 함께 누릴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되찾을 값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시편 기자가 말했듯이. 사람의 목숨값은 너무 비싸서 아무도 치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되살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우리가 치를 수 없는 값을 치르러 가십니다. 그 길을 베드로가 막아섰고, 예수님은 그를 뒤로 세우고 계속 걸어가셨습니다.

십자가는 수치입니다. 그리고 영광입니다.
십자가는 박탈입니다. 그리고 부요입니다.
십자가는 공포입니다. 그리고 기쁨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생명입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닙니다. 수치인 채로 영광이고, 죽음인 채로 생명입니다. 수치를 다 지나고 나서 영광이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수치가 곧 영광입니다. 그것이 역설입니다.

그러니 이 길은 손해를 감수하면 나중에 이득이 온다는 계산이 아닙니다. 그런 계산이라면 베드로가 옳았을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으면,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얻습니다.

우리의 자리를 지키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함께 가는 맑은물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