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2026. 9. 6.
그들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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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두세 사람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이 말씀은 참 은혜가 됩니다.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에게 위로와 힘이 됩니다.
특히 적은 무리가 모여 기도회를 하거나 소그룹으로 모일 때, 이 말씀은 그 모임의 무게를 다르게 만들어 줍니다.
맑은물은 가정교회로 모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우리 모임을 든든하게 지탱해 줍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찬양하고 기도하고 서로를 축복하고 말씀을 나눕니다. 이 자리에 우리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문맥안에서
그런데 이 말씀은 문맥 안에서 읽을 때 무게와 울림이 훨씬 커집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섯 묶음으로 배열했습니다.
5-7 장 산상수훈, 10 장 파송 설교, 13 장 비유 설교, 18 장 공동체 담화, 24-25 장 종말 설교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이 다섯이라는 숫자가 모세오경을 의식한 구조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중 네 번째, 공동체 담화의 일부입니다.
18 장 전체를 간략히 보겠습니다.
· 1-5절 ⎮ 누가 큰가 — 어린아이
· 6-9절 ⎮ 작은 자 하나도 실족시키지 말라
· 10-14절 ⎮ 잃은 양 비유 — 작은 자 하나도 잃지 않는 것
· 15-20절 ⎮ 형제가 잘못을 했을 때
· 21-22절 ⎮ 몇 번 용서할 것인가
· 23-35절 ⎮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
18 장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작은 자 하나도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 작은 자 하나도 잃지 않는 공동체, 한없이 서로를 용서하는 공동체입니다.
그 한가운데 오늘 본문이 있습니다. 하나도 잃지 않고 무한히 용서하는 그 과정에서, 서로 정직하게 대면하며 사람을 얻는 이야기입니다.
대면하는 자리가 쉬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불편한 점을 이야기하는 것, 형제자매의 잘못을 드러내어 말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잘못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그 사이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말하는 사람은 상대의 잘못을 들추어 분풀이하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압하고 이기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예수님의 시선으로, 그 사람을 얻기 위해 말합니다.
듣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자기 잘못이 드러나면 수치스럽습니다. 부끄러우니 방어하게 되고, 자신을 지키려고 화를 내거나 숨기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정직하게 드러내고,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입는 마음으로 듣습니다.
대면하는 그 어려운 자리에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기에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습니다.
이것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가장 잘 풀어낸 사람이 아마 본회퍼일 것입니다.
본회퍼는 『신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책의 공동체를 다루는 첫 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본회퍼가 하려는 말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타인에게 이르며, 직접성은 관계를 파괴합니다. 나는 타인에게 직접 다가가 그를 붙잡거나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타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타인 사이에 계시기 때문에, 나는 그를 내 소유나 욕망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존중하게 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직접 사랑하려 할 때, 그 사랑은 쉽게 변질됩니다. 이기적인 욕망이 되고, 소유욕이 되고, 지배욕이 되고, 감정적 집착이 됩니다.
내 판단과 내 감정으로 상대를 대하지 않습니다. 나와 상대 사이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쳐서 바라봅니다. 그럴 때 비로소 그 사람이 내 욕망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한 인격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형제자매의 잘못을 말하는 사람과 그것을 듣는 사람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자기감정을 풀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말합니다.
듣는 사람은 상대의 지적으로 듣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나를 깨끗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고 반응합니다.
손절하는 사회, 대면하는 관계
오늘 우리 사회는 손절을 기본값으로 여기며 삽니다.
불편함이 생기면 조용히 연락을 줄입니다. 그렇게 관계를 정리합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정리됩니다.
왜 손절이 기본값이 되었을까요?
· 이런 것까지 말해야 하나 싶습니다. 괜히 내가 예민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그런 말을 하는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 대화를 시도했다가 더 힘들어진 경험이 있습니다. · 갈등을 푸는 데 쓸 에너지가 없습니다. 살아남는 데 이미 다 쓰고 있습니다. · 말해도 관계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나를 지키는 법에 익숙해졌습니다.
고슴도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추워서 가까이 가면 서로 가시에 찔리고, 아파서 물러나면 다시 춥습니다. 그래서 고슴도치는 찔리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찾아냅니다.
우리도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거리를 조절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그리스도를 두라고 말씀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의 잘못을 보았을 때, 우리는 흔히 두 가지 중 하나를 합니다.
하나는 눈을 감는 것입니다. 손절과 비슷합니다. 관계가 틀어질까 봐, 괜히 예민한 사람이 될까 봐, 참견했다가 더 힘들어질까 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참으며 지나갑니다.
다른 하나는 그 사람 말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당사자와 이야기하기는 어려우니까요. 다른 사람에게 은근히 그를 비난하며 내 감정을 토로하고 내가 옳다는 것을 확인받습니다.
사실 우리는 대개 두 가지를 다 합니다. 조용히 물러나 거리를 두고, 동시에 그 사람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 두 가지 선택지를 주지 않습니다. 세 번째 길, 어려운 길을 제시합니다. 대면하여 이야기하는 길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사람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앞의 두 가지는 나를 보호하고 내 감정을 푸는 선택은 될 수 있어도, 사람을 얻지는 못합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5 절)
우리가 관계에서 계산하는 방식은 대개 손실 최소화입니다. 더 상처받기 전에, 더 소모되기 전에 정리합니다. 남는 것은 없지만 잃는 것도 없다는 계산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다른 계산법을 말합니다. 손해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입니다.
"형제를 얻은 것이다"에 쓰인 동사는 본래 상업 용어입니다. 남는 장사를 했다는 뜻입니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선교 용어로 자리 잡습니다. 바울은 더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베드로전서는 믿지 않는 남편을 얻으려고 말 없이 정결하게 사는 아내에게 이 단어를 씁니다.
갈등과 어려운 관계에 손절만이 답은 아닙니다. 사람을 얻는 길도 있습니다.
조용히 거리를 두는 것이 손해 보지 않는 길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관계를 잃고 사람을 잃는 계산입니다.
대면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 보여도, 그것이 사람을 얻고 관계를 자라게 하는 계산법입니다.
물론 대면한다고 결과가 다 좋지는 않습니다. 우려했던 일이 그대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를 보호하려고 거리만 유지하면 관계는 끊어집니다. 그리고 나와 그 사람의 인격적 성장도 거기서 멈춥니다.
손절이 편한 사회의 관계 방식은 나를 지키기 위해 사람을 포기하는 방식입니다. 그 사이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실 틈이 없습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길은 다릅니다. 힘들고 어려워 보여도 대면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사람을 얻고 관계를 세우는 길입니다. 그와 나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관계 방식은 사람을 얻으려 합니까, 잃으려 합니까?
그와 나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까?
【잠시 침묵】 지금까지 나의 갈등과 어려운 관계에 대한 대처법은 어떠했는지 돌아봅니다.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잘못, 죄
우리는 서로 다릅니다.
다름으로 기쁨과 풍요를 누리기도 하고, 다름으로 갈등과 불편을 겪기도 합니다. 다른 것은 다름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리고 그 다름이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관계로 나아가면 됩니다. 더불어 함께 사는 법을 배우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어둠이 있습니다. 각자 기질에 따른 방어기제가 있고, 자라온 환경과 어릴 적 상처로 인해 자기를 지키려고 작동하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빛 되신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 어둠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과정일 것입니다.
이 어둠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죄를 짓는 일이 생깁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관계 안에서 잘못과 죄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예수님은 이미 아셨습니다.
여기서 죄라는 단어가 제법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죄일 수 있습니다. 돈 문제, 성적인 문제, 거짓말, 사람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넓게 보겠습니다. 우리가 아는 죄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자기중심성입니다.
죄의 어원적 의미는 과녁을 빗나가는 것, 틀어진 것입니다. 사랑은 본래 타자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그 사랑이 자기 안으로 굽어진 것. 이것이 죄의 핵심입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로마서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자기 안으로 굽어진 사랑이 이웃에게 해를 입힙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어둠입니다.
그래서 15 절을 로마서식으로 바꿔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해를 입히거든…"
상처를 입히거든, 이렇게 읽어도 좋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죄는 구체적입니다.
"그 사람은 원래 그래" 같은 인격 평가가 아닙니다. 내 해석도 아닙니다. 구체적인 사실을 가지고, 그것이 나에게 어떻게 해가 되고 상처가 되었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을 말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평가나 해석을 말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여기까지 가는 데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 비폭력 대화입니다. 필요하다면 맑은물 필독서로 계속 읽고 훈련하면 좋겠습니다.
가서 / 단 둘이 / 드러내어라
이런 상황이 생기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손절이 빠른 사회에서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멀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말하여라!
아, 쉽지 않습니다. 참 곤란한 말씀입니다.
차라리 그냥 참으라고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모른 척하고 거리를 두면 되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가라고 하십니다. 단둘이 만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괜히 나만 예민한 사람 되는 것 같고… 별일 아닌 것 가지고 그런다고 하면 어쩌나 싶고… 말했다가 관계만 더 나빠지면 어쩌나 싶고… 이런 이야기 해서 좋게 해결된 경험이 없어서… 차라리 나만 참으면 되지 싶은데…
해를 입고 상처를 입은 사람이 상대를 찾아가 단둘이 대면하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을 하라고 하실까요. 15 절 마지막에 답이 있습니다. 그것이 형제를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일어나 가야 합니다.
대면하여 만납니다. 혼자 삭이지 말고, 주변 사람들에게 하소연하듯 말하지 말고, 그와 마주 앉습니다. 첫발입니다. 큰 용기입니다.
그리고 오직 단둘이 만납니다.
왜 단둘일까요. 공개 범위를 최소로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직 상대에게는 뉘우치고 돌이킬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드러나기 전에 그의 명예와 회복 가능성을 지켜 주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흔히 보는 방식은 정반대입니다. 사람들 다 있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저격하거나, 단톡방과 커뮤니티에 폭로해 버립니다.
그러면 상대의 명예는 떨어지고 돌이킬 기회는 사라집니다. 그렇게 시작된 일은 싸움으로 번지고, 결국 목소리가 크거나 여론을 쥔 쪽이 이깁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새로 만드신 방법이 아닙니다.
레위기 19 장 17-18 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동족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이웃이 잘못을 하면, 너는 반드시 그를 타일러야 한다. 그래야만 너는 그 잘못 때문에 질 책임을 벗을 수 있다.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그 유명한 말씀이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참 놀랍습니다.
순서를 보십시오. 미워하지 말아라. 타일러라. 사랑하여라.
말하지 않고 마음에 담아 두는 것, 주변에 흘리는 것은 미워하는 쪽입니다. 대면하여 말하는 것이 사랑으로 가는 길입니다.
가서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말합니까.
새번역은 충고하여라, 개역개정은 권고하라, 공동번역은 타일러 주어라로 옮깁니다. 원문의 뜻은 드러내다, 밝혀서 깨닫게 하다입니다.
이 낱말은 요한복음에서 성령이 세상의 죄를 드러내시는 일에 쓰였고, 에베소서에서 빛이 어둠의 일을 드러내는 데 쓰였습니다.
그러니 대면하여 말하는 일은 상대를 궁지에 몰아 "너 잘못했지" 하고 승복을 받아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비평이나 평가나 해석이 아니라, 사실을 전하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좋은 줄 알면서도 실천이 안 되듯이, 사람을 얻고 관계를 성숙하게 하는 일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이 어려움을 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들으면 그 사람을 얻은 것이다"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러나 그래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여라.”
현실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 어둠이 드러나고 그 어둠을 빛 가운데로 가져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렇게 설교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대개 잘 안 됩니다.
어렵게 용기를 내어 대면하여 말했는데, "그랬구나, 내가 잘못했네, 미안하다"는 말을 듣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오히려 상대가 화를 냅니다. 너는 얼마나 잘났느냐고 되받습니다. 역으로 나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네가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며 별일 아닌 것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두 사람의 신뢰할 만한 이가 함께 가고, 그래도 안 될 때는 공동체가 함께 다룹니다.
그 이유는 끝까지 그 사람의 잘못을 파헤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어둠이 빛 가운데 드러나고, 돌이켜 회복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17 절 뒷부분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 때문에 마음이 무거우실 수 있습니다. 다만 마태복음에서 세리는 예수님의 식탁 동료였고, 이 복음서의 마지막 명령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것이었음을 기억합시다. 이 말씀은 그 사람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제는 형제로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찾아가야 할 사람으로 대하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권력을 쥔 사람에 대해서…(간략하게)
현실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면한 것과 대면하지 않은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나의 역할은 그 사람을 돌이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어둠을 빛 가운데 드러내는 데까지입니다.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계속 어둠 가운데 머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기를 내어 말한다면, 그것은 빛으로 나올 기회가 되고, 회복할 기회가 되고, 사람을 얻는 기회가 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십니다.
어둠의 일을 대면하여 말하고 드러내는 자리에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대면하는 그 어색한 자리, 손에 땀이 나고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그 공간, 좋은 결말보다 부정적인 결말이 더 많은 그 자리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러니 대면하기를 외면하지 맙시다. 어렵고 힘들지만 용기를 내어 다가갑시다.
주님이 그 사이에 계십니다. 그리고 대면하여 이야기할 때, 사이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말합시다.
맑은물은 가정교회를 기초로 한 공동체입니다. 가정교회가 자라고 깊어지는 데는 대면하여 이야기하고 사람을 얻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아는 어둠이 있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둠이 있습니다.
아는 어둠은 감추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긴장이 풀리는 순간 드러납니다.
내가 보지 못하는 어둠은 관계 안에서 다른 사람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래서 나를 정직하게 돌아보게 해주는 공동체와 관계가 필요합니다.
나와 너 사이에 축복으로 마치며
이 말씀은 대면하는 자리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만남과 모임과 관계에 해당합니다.
우리의 눈동자에, 우리의 말에, 우리의 귀에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배를 마치면서 패트릭의 흉배기도로 서로를 축복합니다.
나와 너, 각자의 일상에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기를 축복할 뿐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도 축복합니다.
우리의 교제와 만남과 예배와 관계에, 보는 것과 듣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셔서 우리 일상의 모든 순간을 거룩하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잠깐 상상하고 묵상해 봅시다.
나와 여러분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십니다. 지금 여기 우리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좌우 옆을 보실까요. 나의 좌우, 그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십니다.
앞뒤를 보실까요. 나의 앞과 뒤, 그 사이에 우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가정에,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사랑하는 친구와 연인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고, 너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숨 쉽니다. 나와 너 사이, 우리 사이에 예수님이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가정교회로 모일 때에 우리 주님이 거기 계십니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와 너를 통해 예수님을 드러내고 증거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믿음이고 진리입니다.
우리 몸으로 감각되지는 않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감각하며 삶으로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사이에 계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서로 대면하고,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고, 서로의 어둠을 빛으로 가져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