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2026. 9. 12.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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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공동체는…
마태복음 18장은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8장 전체를 놓고보면 큰 무리를 지키기 위해 작은 자 하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아니 역으로 작은 자 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맑은물공동체는 그리고 각 가정교회에서 작은 자의 목소리, 작은 자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를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더디 가더라도 함께 가는 맑은물이기를 바라고, 이념이나 대의 때문에 사람을 잃지 않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와 너 사이, 우리 안에 예수님이 거하시기를 바라고, 서로에게 그 예수님을 비추는 관계이길 바랍니다. 작은 자의 존재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작은 자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발견하는 맑은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태는 마태복음 18장 공동체에 대한 담화를 마치면서 용서의 이야기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그냥 단편적으로보면 마태가 말하고 싶은 공동체는 서로를 한없이 용서하는 공동체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서로 다름과, 자기중심성의 어둠을 가진 이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은 필연적으로 갈등과 다툼, 그로 인한 상처와 원망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곳곳에서 서로 용서하라, 서로 용납하라고 권고합니다. 허물을 덮어주라, 참으라, 비판하지 마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 등 비슷한 말씀도 많습니다.
그러니 어찌보면 교회는, 공동체는 끊임없이 용서하고 용납하며, 용서를 구하고 용납을 구하는 곳이 아닐까요?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아가고, 그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체화하는 곳이 아닐까요?
일곱번?이면?...
내게 잘못한 형제에 대해 대면하여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지고 난 다음에 베드로가 ‘저요. 저요’하며 손을 듭니다. “예수님! 예수님! 내 형제가 나에게 똑같은 잘못을 하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줄까요? 한 일곱 번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이 질문을 하며 예수님의 칭찬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앞서 잘못한 형제를 대면하고, 한두사람이 같이 하고, 공동체가 같이하라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나는 일곱번이나 용서를 이야기했으니 예수님이 “오! 대단한데! 일곱번씩이나 참았어! 그래 그정도면 참을만큼 참았어”라고 말씀해주실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 뜻밖입니다. “일곱번도 대단하긴 한데… 그런데 있잖아. 베드로야… 그리고 제자들아… 일흔번을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단다.”
우와 이건 무슨 뚱딴지 같은 말씀인가요? 칭찬을 기대했던 베드로는 충격에 휩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그게 가능한 일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베드로는 용서의 한계를 정하고 싶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용서의 한계는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만큼 했다!라며 스스로 자위하고 싶지만 그마저도 용서에 있어서는 할만큼했다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몇번까지라는 베드로의 물음에 일흔에 일곱번이라는 답을 주시지만 정작 예수님의 대답은 한계를 짓지 말고 용서하는 말씀입니다.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라는 말은 77번일 수도, 490번일 수도 있겠지만 78번째, 491번째 되는 때에는 용서 안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 여기에 사용된 표현은 창세기의 라멕의 노래를 예수님이 뒤집으신 것입니다. 창세기 4:24 /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배면, 라멕을 해친 벌은 일흔일곱 배다. 라멕은 무한히 반복되는 복수를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라멕의 말을 가져와서 용서의 무한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인류사에서 가장 오래된 복수의 노래를 예수님은 용서의 말로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여기서 숫자는 무의미합니다. 몇번이 아니라 셈을 그만두고 한없이 용서하는 자리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무한히 용서하라니요!!! 나를 만만하게 보면요? 그러다가 내가 속병이나면요? 나를 호구로보고 무한히 잘못을 반복하면요? 그건 예수님이나 가능한 일인거 아닌가요? 사람이 가능한 일인가요? 질문이 듭니다. 예수님 저는 베드로가 말했던 일곱번도 많은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왕이 있었는데…
그러면서 예수님은 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하늘나라는… 익숙한 하나님나라의 비유입니다.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과 같다…. 이 왕은 어떤 왕인가요? 그리고 이 왕은 자기 종들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요? 이게 오늘 예수님 비유의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왕이 셈을 하기 시작하는데 일만달란트를 빚진 종이 끌려옵니다. 그 종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자, 종이 무릎을 꿇고 참아달라고 다 갚겠다고 애원합니다. 그런데… 아 그런데… 주인은, 왕은 그 빚을 탕감해줍니다.
여기 종이라고 표현되어있는데 아마도 그 왕국의 재정을 맡은 고위 관리였겠지요. 일만달란트를 어떻게 빚질 수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일만달란트를 빚을 집니다. 만이라는 단위는 당시 셀 수 있는 가장 큰 수이고, 달란트는 당시 가장 큰 화폐단위입니다. 가장 큰 수와 가장 큰 단위가 만난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롯 대왕시절 왕국의 세금으로 걷어들인 세수가 한해 900달란트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종 하나가 왕국 열개에 해당하는 세수를 빚진 것입니다. 이 종이 빚진 금액이 얼마인지 조금 더 계산해 볼까요?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데나리온은 당시 하루 일당에 해당합니다. 계산을 좀 편하게 하기 위해서 최저시급정도로 해서 하루 일당을 10만원으로 잡으면 1달란트는 10만원*6,000=6억에 해당하고 6억에 만을 곱하면 6조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하루일당으로 하면 약 16만년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고 갚아야 할 액수입니다.
말도 안되는 돈입니다. 그리고 말도 안되는 탕감입니다. 있을 수 없는 빚이고, 있을 수 없는 면제입니다.
그의 빚을 탕감해준 것은 왕의 관대함, 왕의 긍휼이었습니다. 그 종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의 말도 안되는 빚을 탕감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빚진 동료를 만납니다. 백데나리온입니다. 백일치 임금이고 아까와 같은 계산으로 하면 약 천만원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그런데 이 종은 그 동료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강요합니다. 그 동료는 간청합니다.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어디서 많이 듣던 말입니다. 바로 그가 왕에게 했던 말입니다. ‘참아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그러나 이 종은 그가 왕에게 했던 말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애원하는 그 동료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그를 감옥에 넣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있게 합니다. (감옥에 갇혀있으면 빚을 더 못 갚을텐데…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다고 빚이 갚아지지 않는데… 그렇게 합니다. 어떻게보면 내가 직접 용서하지 않고 원망하고, 보복한다고 그 상처와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 사실이 왕에게 알려지자 그 종도 왕 앞에 다시 끌려갑니다. 그 종에게 왕이 말합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애원하기에 나는 그 빚을 다 없애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왕이 요구하는 것은 보답이 아니었습니다. 탕감받은 빚에 해당하는 갚음이 아니었습니다. 왕에게 받은 것을 왕에게 돌려드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받은 것을 옆으로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자신이 탕감받은 것처럼 다른이들을 긍휼히 여기고 탕감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위로 갚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흘려보내고 번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왕은 이상하리만치 긍휼히 여기는 왕입니다. 그리고 말도 안되는 빚을 탕감해주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왕은 말도 안되는 빚을 탕감받은 종이 다른 동료들을 동일하게 긍휼히 여기고 빚을 탕감해주기를 바라는 왕입니다.
예수님은 용서의 한계를 정하려는 베드로의 질문에 용서에 한계가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계 없는 용서가 가능하냐?는 들리지 않는 묵음처리된 물음에 우리가 받은 용서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말이 안되는지, 그 크고 말도 안되는 용서를 알면 그럴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용서는 우리가 더 큰 용서의 이야기 안에 있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용서의 이야기는 우리가 받은 용서가, 우리에게 베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얼마나 큰지 알면 알수록 그 용서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
예수님이 들려주는 빚의 액수는 상상도 안되는 금액이고, 그것을 탕감해주는 왕은 비현실적인 왕입니다. 사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어찌보면 기독교의 이야기가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반역해서 그 자리를 찬탈할 수 있습니까? 반역의 죄를 지은 인간을 어떻게 긍휼히 여기고 구원하기 위해 애달아 하는 신의 모습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습니까? 그런 인간을 구하기 위해 창조주가 죄인의 몸을 입고와서 피조물의 손에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가 죽기 전 유산을 달라는 아들에게 매가 아니라 유산을 주는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의 이야기, 재산 다 말아먹고 돌아온 그 아들을 다시 아들로 맞아들이고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잔치를 벌이는 비현실적인 아버지의 이야기가 바로 나의 이야기, 너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그런 이해할 수 없는 긍휼을 입은 사람들, 있을 수 없는 용서를 받은 사람들, 비현실적인 사랑의 존재들이 아닙니까?
내가 받은 용서의 이야기, 우리가 받은 긍휼의 일들을 떠올리며 묵상해봅시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용서하셨는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의 모진 수모와 고통을 참고 또 참으신 끝내 십자가 상에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소서”라며 기도하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상상해봅시다.
조준모씨는 우리가 받은 용서와 변화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 바꾸셨네 고아에서 아들로 거절에서 용납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꾸어 주셨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 바꾸셨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 바꾸셨네 저주에서 축복으로 원수에서 연인으로 창기에서 신부로 바꾸어 주셨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 바꾸셨네
우리는 모두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 속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비현실적인 이야기 속의 사람들입니다. 나와 너는 바로 이 이해가 되지 않는 용서와 긍휼을 입은 존재들입니다.
너희가 각각
예수님은 이야기를 마무리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 말씀은 경고일까요? 경고 일수도 있습니다. 조건일까요? 그럴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용서함으로 용서를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통해 우리가 용서받은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무한히 용서하는 그 자리를 통해 우리가 말도 안되는 용서를 받은 자임을, 비현실적인 그 용서가 이 세상에 존재함을, 계산적이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그 용서가 가능한 것을 증거합니다.
용서 쉽지 않습니다. 저도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했던 말들, 그의 눈 빛, 그의 얼굴, 그 공간의 공기와 느낌 여전히 살아있어 그 사람을 대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고 어렵다고 해서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마냥 묵혀두고 회피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 나를, 그리고 그를 죄에서 자유케 하시는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우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입니다.
어떻게 그 용서의 자리에 이를 수 있을까요? 오늘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가 받은 다함없는 용서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와 긍휼이 용서의 자리에 서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의지를 다해서, 굳게 마음 먹는 것으로 한없는 용서의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과 용서가 얼마나 말도 안되고 비현실적인 것인지를 알면 알 수록 한없는 용서의 자리에 서게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 존재와 삶을 재해석하게 될 때, 용서할 수 없는 그도 하나님 안에서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한없는 용서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요셉은 용서를 비는 형들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형님들의 자식들을 돌보겠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다. 하나님 안에서 나를, 그리고 형들을 보게 될 때 형들을 용서하고 돌보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한없는 용서의 공동체
누구나 마음에 청구서 하나는 들려 있습니다. 몇번이나 접었다 폈다 반복했는지 모릅니다. 용서 쉬운일이 아닙니다. 거기다 한없는 용서라니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는… 교회 공동체는 그 불가능한 일을 서로 가능하다라고 말하고 증거하는 공동체입니다.
억지로 그를 “용서하십시오.”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그 형제, 자매를 하나님 앞에 올려드립니다. 그리고 나의 존재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립시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나의 움켜쥔 주먹에서 힘을 빼고 펼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시선과 마음으로 나의 삶과 그의 삶을 바라보게 해달라고 간구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이에 계셔서 일하시도록 맡겨드립시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라고 말했던 요셉의 말을 떠올려 봅시다. 주님 어렵고 힘들지만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것처럼, 너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그 자리에 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때가 이르러 그 자리에 우리 모두가 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용서와 자비를 잃어가는 세상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복수와 응당한 처벌을 당연히 여기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한없는 용서와 자비의 공동체입니다. 마태복음 18장은 그런 공동체를 이야기합니다. 작은 사람 하나도 잃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 서로가 서로에게 예수님을 비추이는 공동체, 서로 한없이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공동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의 공동체가 그런 공동체여야 하지 않겠냐고 우리에게 반문합니다.
맑은물이 지내오면서 이런 저런 갈등도, 다툼도 많았습니다. 22년을 함께 지지고 볶고 살아온 세월만큼의 앙금과 체념과 적당한 거리두기와 원망과 서운함의 감정들이 있겠지요. 주님께서 나와 너 사이에, 우리 안에 일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향해 움켜쥔 손이 자연스럽게 풀어질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주먹쥐고 있어 진심으로 악수하고 안아줄 수 없었던 관계가 기쁘게 펼친 손으로 악수하고 두팔벌려 서로를 안아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맑은물 안에 한없는 자비와 용서가 흐르기를… 막힌 물줄기가 열려서 다시 흐르기를… 그렇게 용서없는 세상에서 용서가 가득한 공동체로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