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나귀를 타신 왕 예수

본문

Celeb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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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마지막 주가 사순절 여섯번째 주간을 보냅니다. 이번주간에는 특별한 별칭이 붙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던 주님을 향해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던 일을 기념하며 ‘종려주일’이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때로부터 한주간 십자가 ‘고난’이 시작된다고 해서 ‘고난’주간이라고도 부릅니다. ‘종려주일’이든 ‘고난주간’이든 어느 편이 되었든 사순절의 마지막은 ‘고난’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에 스러지고, 어둠에 삼킴당하는 ‘고난’이라는 것을 직면하게 됩니다. 주님의 고난받으심을 묵상하는 이번 한주는 우리에게 무척이나 불쾌하고 불편한 시간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은 죽음의 한복판에서 말없이 침묵하며 머무셨지만, 이와 달리 우리는 참을 수 없는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섣불리 기적을 말하거나 서둘러 부활을 준비하려고 듭니다. 그러나 ‘고난’ 주간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죽음’을 똑바로 직면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 안에서 순박한 ‘무력’과 ‘패배’의 아득함을 경험하라는 겁니다. 한주간 월드비전에서 발행한 고난주간 묵상집을 통해서 주님에 고난을 묵상하며 ‘죽음’ 앞에선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직면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 주간에는 ‘무얼 더 어떻게’?라기 보다는 무력하게 머무는 인내의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받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과 회복과 소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한번 되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6월 3일 새로운 대한민국의 지도자를 뽑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다시는 잘못된 대통령을 뽑아 고통과 아픔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후보들의 면면을 잘 살피고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선거는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의 삶과 미래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시간입니다. 누가 지금 한국 사회가 나아갈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을 주인으로 잘 섬길 수 있는 사람인지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두달 남지 않은 기간 잘 살피고 서로 격려하며 위기의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지도자를 잘 선택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종려주일 예수님은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런데 그 왕이 나귀를 타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왕으로 오셨는지 살펴보고 그 왕을 따르는 백성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함께 묵상하고 살펴보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왕이시다

예수님은 여리고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긴 오르막을 오르며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은 제자 둘을 보내며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풀어 오라고 하십니다.

누가는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의 여정을 묘사하며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어떠한 부분을 드러내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 장면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특정 소품이나 장면들이 우연히 배치된 것이 아니라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이듯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의도적으로 나귀를 타고 들어가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이 아니라 왕의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오래 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스가랴 9:9
왕이 오십니다. 공의로운 왕!, 구원을 베푸는 왕! 왕이 오시는데 그가 군마나 병거를 타고 오는 것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올 것이라고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렸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로 그에게 왕을 맞이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나아가시는데, 제자들이 자기들의 옷을 길에 깔았다. 예수께서 어느덧 올리브 산의 내리막길에 이르셨을 때에, 제자의 온 무리가 기뻐하며,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을 두고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였다.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 누가복음 19:35-38
사람들은 겉옷을 길에 펼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큰 소리로 찬양합니다.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큰소리로 찬양하는 것은 왕을 맞이하는 의식이었습니다. 누가는 이 장면을 시편 118편을 인용하며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편 118편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늘 불렀던 ‘왕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승전가로, 적을 전부 무찌르고 그 나라를 세우시는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과 이를 맞이하는 군중의 퍼포먼스와 찬양은 모두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 두가지 장치를 통해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통치자로 우리 존재와 삶의 주권자로 오셨습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세상에 힘과 돈과 타자의 희생을 통한 지배가 가득한 나라에 섬김과 내어줌 자기 희생을 통한 사랑의 나라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 중심과 나의 나라를 세우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라 타자를 위해 희생하며 사랑하는 나라의 백성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우리 존재와 삶의 주관자로 오셨습니다.


왕정국가에 살지 않고 개인의 자유가 극대화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다는 이 진리가 잘 와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잘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예수님은 온 세상의 통치자로 우리 존재와 삶의 생사화복을 좌우하는 주권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른 다는 것은 우리 존재와 삶의 총체적인 주관자로 고백하고 믿고 따름을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정서적인면에만 제한해서 이해해온 사람들은 그저 내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에만 예수님을 찾고 감정적 정서적 위안제로만 예수님을 의지합니다.

복음을 소위 영적인 차원에서만 제한해 온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죄를 사해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합니다. 오랜동안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 이해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저 내 죄 사함을 받고 천국가게 하는 분으로만 받아들입니다. 내 심령의 왕이지만 내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복음에 대한 이런 오해는 우리로 하여금 이원론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소위 말하는 선데이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일상의 삶과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연결짓지 못합니다. 우리의 전 존재와 삶을 통해 따르고 섬겨야할 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저 교회생활과 소위 영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우리 삶 전체를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주되심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칩니다. 우리의 존재와 모든 시간을 다스리시는 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내 삶에 그분의 인격과 다스림이 나타나도록 기도하며 내어드리는 삶을 통해 예수님을 따릅니다. 하나님나라의 통치와 다스림이 나의 인격과 삶과 우리가 사는 사회에 어떻게 나타나야하는지 배우고 변화하며 드러내며 살아가는 삶의 총체적인 따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인격과 관계와 삶에서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살고 있습니까? 나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르고 있습니까? 내 인격과 삶에서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면서 나타나는 변화가 있습니까? 
우리 존재와 삶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심으로 나타나는 변화의 증거가 있기를 소망하며 기도합시다. 주님 내 인격을 다스려주십시오. 주님 내 삶을 향한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보여주십시오. 주님 내 존재와 삶을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주님 다스려주시고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변화시켜주시고 이끌어주십시오. 기도하며 왕되신 주님을 따르는 맑은물이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시다

예수님은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왕은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타셨습니다. 예수님은 나귀, 그것도 아직 길들어지지 않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당시의 왕들은 멋진 군마를 탔습니다. 말은 힘과 전쟁의 상징이었습니다. 당시의 왕은 화려한 군마와 전차를 앞세워서 수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도시에 입성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자신의 힘과 권위를 과시했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을 통한 전쟁과 폭력 힘의 지배를 상징했던 것이 말을 타고 입성하는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군사력과 전쟁과 폭력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겸손과 희생과 사랑을 통한 섬김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아까 읽은 스가랴 9장 9절의 바로 뒤 10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 스가랴 9:10
나귀를 타고 오신 왕은 병거를 없애고, 군사를 없애고 활도 꺽어 모든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며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왕입니다. 나귀는 평화와 겸손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왕인지를 나귀를 탐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성서일과의 빌립보서 말씀은 우리에게 오신 왕이 어떤 왕인지 분명히 보여줍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8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권력과 특권을 움켜쥐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왕이시지만 종으로 오셨고, 창조주와 심판자이시지만 피조물의 희생자가 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를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다윗과 같은 왕, 칼을 들고 대적을 물리칠 왕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칼이 아닌 십자가를 들고 오셨습니다. 그분은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적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왕권의 역설입니다. 그분은 섬김으로 다스리고, 죽음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립보서 2:8-11)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지극히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역설입니다. 본문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당시 유월절이되면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혹시나 모를 소요사태를 대비해 곳곳에 로마의 병사들이 주둔해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병사와 군마와 무기를 들고 주요 시설과 길목에 주둔해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를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지나가십니다. 폭력과 전쟁을 상징하는 로마군사의 사이로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신 예수님이 지나가십니다. 폭력과 전쟁과 혐오와 배제가 가득한 세상에 예수님은 겸손과 섬김과 포용과 사랑이 가득한 평화를 가져오십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힘과 돈과 지위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이용해 전쟁을 불사합니다. 부의 불균등한 분배는 계층을 만들고 불평등한 사회를 공고히 합니다. 사회에 위기와 재난이 닥치면 늘 저소득층 계층이 위기에 내몰리고 삶이 뿌리채 뒤흔들리는 것을 목격합니다. 자신이 가진 위치와 권력을 이용해서 갑질하고 착취하고 뒤흔듭니다. 힘과 돈과 지위의 지배는 사회적 구조를 만들고 그 구조는 견고하게 우리 삶에 그물망처럼 짜여져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한번 실패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불안한 사회를 만듭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고 마음을 열어 대하기 보다는 경쟁과 이익의 관계에서 기계적으로 서로를 이용의 대상으로 취급합니다. 숫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배기량과 성적과 연봉의 숫자가 사람을 평가하는 가치의 척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소망하고 바랍니다. 하나님나라가 임하길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온 세상 가운데 우리 삶에 나타나길 바랍니다. 노동한 만큼 정당한 보수가 주어지고 노동의 귀천이 없는 세상! 실패해도 두렵지 않고 무한히 도전해도 되는 나라!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다름이 다양성이 존중받는 세상! 힘과 지위는 책임과 섬김의 자리임을 알고 자신의 정직하고 청렴하게 섬기는 어른이 있는 세상을 바랍니다.

군마가 아니라 나귀를 타신 예수! 칼이 아닌 십자가를 들고 오신 예수! 폭력이 아니라 섬김으로 평화를 가져온 예수! 자신의 생명을 내어줌으로 왕이 되신 예수! 그 예수님이 다스리는 세상을 함께 꿈꾸고 그 다스림이 우리 존재와 삶에 나타나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겸손의 왕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겸손의 왕을 어떻게 따라야 합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삶의 양식을 보여주어야 합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이사야 50:4-6)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분을 따르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은 고난에 직면하지만 고난에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약하고 곤고한 이들을 돕고 섬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짐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평화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 또한 그 주님을 따름으로 때로는 희생하고 고난에 직면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이웃에게 세상에게 생명과 평화를 가져오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우리 사회의 모습으로 인해 곳곳에 곤고한 이들을 만납니다. 이 곤고한 이들, 절벽에 내몰린 이들을 무엇으로 위로하고 도울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아니고는 곤고한 이들의 마음에 힘과 생명을 북돋을 수 있을까요?


좀 오래 되었지만 ‘주가 필요해’라는 곡이 있습니다. 
가사를 불러드리겠습니다.

1.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소리 주님 들으시네

2. 캄캄한 세상에서 빛으로 부름 받아


잃어버린 자들과 나누라고 하시네


주의 사랑으로만 사랑할 수 있네


우리가 나눌 때에 그들 알겠네

(후렴)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나귀를 타신 겸손의 왕, 종의 형체를 입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한 평화의 왕 
그분의 말씀과 다스림이 아니고는 무엇으로 곤고함을 채을 수 있을까요?



먼저는 우리 삶의 곤고함에 예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 존재에 가득 넘쳐서 주님의 생명과 평화와 사랑이 가득 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곤고한 세상에, 곤고한 이들에게 우리 주님의 생명과 평화와 사랑을 전하고 나누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나귀를 타신 겸손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안에 가득 머물길 바랍니다. 
곤고한 세상에 나귀를 타신 겸손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선물하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이제 기도로 마치겠습니다.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 당신은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지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당신은 모든 권세를 가지셨지만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당신은 심판자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겸손과 섬김을 본받게 하소서. 우리도 이 세상에서 섬김의 삶, 순종의 삶, 고난도 감수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나라의 지도자들도 당신의 겸손한 리더십을 배우게 하소서. 그래서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넘치게 하소서. 겸손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