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은혜의 계산법

설교

2026. 9. 19.

은혜의 계산법

옆으로 넘겨 주세요

Celebration

은혜!!!

우리는 나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은혜는 환영하고 좋아하지만 타인에게 특히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는 싫어합니다.

특히나 오랫동안 하나님을 섬겨왔다고 자부했는데, 그 오랜 섬김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내가 미워하고 어쩌면 무가치하게 여겼던 누군가가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듯 그 사람도 동일하게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래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형제, 자매로 받아들이고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머뭇거리고 수동적인 저항의 모습을 보입니다.

성서일과의 구약의 요나본문에서 요나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어떤분인신지 정확히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롭고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시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오기를 싫어했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기를 거부하며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이방사람들… 특히나 자신의 민족을 무참히 짓밟았던 앗시리아 사람들이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싫었습니다.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니느웨 사람들이 돌이키는 것이 싫었습니다. 
거기다 요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제발 내 목숨을 거두어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같은 하나님나라백성으로 사는 것을 도저히 못지켜보겠습니다. 차라리 죽는게 낫습니다라고 하나님께 투정부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너무나 좋지만 그 사람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몸서리치게 싫습니다. 하나님이 내 편일뿐 아니라 그 사람의 편이라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 사람과 같은 공동체에서, 같은 성찬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 거북합니다. 가급적이면 거절하고 싶습니다. 자리를 피하고 싶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요나의 마음입니다. 

오늘 이 비유는…

오늘 본문이 위치한 자리는 예수님의 공동체 강화 이후에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 가운데 있는 이야기 중에 나온 비유입니다. 19장 20장의 내용은 하나의 묶음이고 오늘 본문이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먼저 된자 나중 된다는 말씀이 봉투구조로 오늘의 비유를 감싸고 있습니다. 
19:1-12/ 이혼논쟁-남편의 일방적인 권리가 제한됩니다.
19:13-15/ 어린아이-사회적 권리가 없는 어린아이가 하나님나라의 주인공이 됩니다.
19:16-22/ 부자 청년-가진 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19:23-26/ 낙타 바늘귀 이야기.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19:27-29/ 베드로의 질문과 열두 보좌의 약속
19:30/ 먼저 된자 나중 되고… 
20:1-16/ 포도원 품꾼 비유

20:16/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20:17-19/ 세번째 수난 예고
20:20-28/ 세베대의 아들들 오른쪽 왼쪽-섬기는 자가 되어야…
20:29-34/ 두 시각장애인의 외침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사람에게 온 세계에 열릴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도래할 것인데 그 하나님나라는 기존의 질서를 뒤집어 엎습니다. 어린아이가 하나님나라의 주인공이 됩니다.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환대받습니다. 먼저된 사람이 나중되고 나중된 사람이 먼저 됩니다. 섬기는 자가 으뜸이되고 예수님은 모두를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가진 상식을 뒤집어 엎습니다. 우리가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서 은혜로 작용하고 은혜가 지배하는 세상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지점이 어쩌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겠습니다. 받은 만큼, 노력한 만큼 보상이 주어지는 공정한 세상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자격이 없어도 노력하지 않아도 누구나 받아 누리는 은혜라는 신비한 세상이 예수님을 통해 오게되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입니다. 


성경에서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시 80:8-9, 사 5:1-7, 렘 2:21). 오늘 비유를 첫 청중들은 첫 시간 품꾼은 오랜 시간 언약의 짐을 져 온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시, 다섯시에 온 품꾼은 예수님 주변에 몰려든 세리와 죄인들이고 곧 밀려 들어올 이방인들을 묘사하는 것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때가 도래했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도래하고, 그 나라에 엉뚱한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새벽에 온 품꾼이 투덜대는 것과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를 아들로 맞아들이는 아버지를 못마땅해하는 큰 아들, 그리고 오늘 성서일과의 요나의 모습은 묘하게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는 새벽 일찍 온 품꾼, 누가복음 15장의 맏아들, 그리고 요나의 심정이 공감이 갑니다. 자격없는 이에게, 납득하기 어려운 존재에게 주어지는 자비와 은혜가 불편하고 마음이 복잡합니다.

이런 불편함을 안고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하나님나라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 위의 여정에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위에서 하나님나라는 세상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하나님나라의 이야기를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주인과 같다.”

하나님나라는 포도원 주인과 같다고 합니다. 이 포도원 주인은 어떤 분인가요? 그리고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행동하나요?

포도원주인은 계속해서 일꾼을 찾기 위해 집을 나서는 사람입니다. 
포도수확은 비가 오기 전 며칠 안에 끝내야 하는 급한 일이었습니다. 늦가을 우기가 시작되면 포도 농작물이 상하기 때문에 속도를 요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일용직으로 대량으로 고용하고 또 하루에 여러 차례 인력을 보충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매시간 품꾼을 구하기 위해 장터로 나가십니다. 새벽에도, 9시에도, 12시에도, 3시에도 심지어 5시에도 주인은 품꾼을 얻기 위해 나갑니다.

베드로후서 3:9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나 뿐 아니라,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나라의 풍성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약육강식과 경쟁, 각자도생에 지친 이들이 하나님나라의 안식과 샬롬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앗시리아의 니느웨 백성도, 내가 생각하는 자격없고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그 사람도 하나님은 모든 이가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이 주인은 모든 일꾼에게 동일한 임금을 주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새벽부터 온 사람은 하루치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나머지는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이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일당을 계산해줍니다. 그것도 온전한 하루일 일당입니다. 한 데나리온입니다. 그러자 새벽부터 온 사람이 그 광경을 보고 5시에 와서 찔끔 일한 사람이 하루 일당을 한 데나리온을 받으니 자신을 그보다 더 많이 받을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웬걸 자신도 똑같은 하루치 일당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자신이 기대했던 것이 깨져버립니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에게 항의 합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 일리있는 것 같습니다. 나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였습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도, 하루종일 찌는 더위 속에서 일한 사람도 같은 임금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포도원 주인의 뜻이고 모든 이에게 후하게 베푸는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 마태복음 5:45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무조건적이고 편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하셨던 말씀처럼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셨듯이 원수 앗시리아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모두에게 넉넉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제한적이었다면, 계산적이었다면, 인색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 찬양에서 고백하듯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네 은혜입니다. 모든 이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습니다. 
차별하지 않고, 편애하지 않고, 인색하지 않은
모든이에게 베푸시는 넉넉하신 후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지금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서일과의 시편 145:8을 함께 읽어 봅시다. 
“야훼는 자애롭고 자비로우시며 화를 참으시고 사랑이 지극하시다.”
그 자애롭고 자비로우시며 화를 참으시고 사랑이 지극하신 그 은혜와 사랑이 지금의 나를 이 자리에 있게했습니다. 지금의 나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끝이 없고, 주님의 자비가 무궁하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그 사랑과 자비가 새로우니, 주님의 신실하심이 크고 큽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은혜와 신실하심을 묵상해봅시다. 
나의 자격이나 어떠함이 아니라 그저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지금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며 그 분의 은혜 안에 머물러 봅시다. 

공정과 은혜

새벽부터 나와서 일한 사람들은 진짜 열심히 일했습니다. 새벽에 나왔고, 더위를 버텼고, 종일 일하고 계약을 온전히 이행했습니다. 저라도 주인에게 똑같이 따져물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에 온 사람이 하루 일당을 온전히 받았다면 나는 그보다 훨씬 더 악조건 속에서 더 많이 수고했으니 응당 더 많이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당연히 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똑같은 임금이 주어진 것입니다.

5시에 온 사람과 새벽부터 온 사람을 비교합니다. 
그러면서 차등이 생기고 저울질하게 되고 더 많은 수고에는 더 많은 임금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내가 이만큼 노력하고 애쓰고 수고했는데… 응당 그에 해당하는 보상이 더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새벽부터 나온 품꾼은 응당 나에게 더 많은 임금이 주어져야 그것이 공정하다고 착각한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가치와 생각입니다. 공정이라고 하는 주제입니다. 노력한 만큼 대가를 지불받고, 기여한 만큼 대우 받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입니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도덕어는 공정입니다. 공정에 대한 열망은 그만큼 반칙없는 사회 불평등한 현실을 바로잡으려는 정당한 요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공정이라는 열망이 극심한 경쟁체계와 생존경쟁을 펼치면서 능력주의로 나타나고 불평등한 현실을 정당화하고 약자를 무시하고 배척하는 역설을 낳고 있습니다. 시험을 통과하거나 성공한 이들은 자신들의 성공을 오롯히 자신의 노력과 능력의 결과로 여깁니다. 반면 낙오하거나 약자의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노력과 자격이 부족하다.”며 무시하고 비하하는 태도가 나타납니다. 공정을 외치다가 공정의 함정에 빠져 타자를 경쟁자로 여기고 존중과 협력하지 못하고 오히려 배척하고 혐오의 대상으로 삼아버립니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2017년 문재인정부가 들어서면서 취임사 중 하나입니다. 
공정이라는 화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도덕어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만큼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 살면서 공정한 세상을 기대하고 소망하기 때문에 나타난 반작용일 것입니다. 반칙과 특권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자 투쟁입니다. 평등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하고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언어 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엄혹한 전제가 하나 숨어 있습니다. 바로 "내가 치른 비용을 남도 똑같이 치러야 한다"는 능력주의의 문법입니다. 성공은 오롯이 내 노력의 결과이므로 나의 당연한 몫이고, 실패는 타인이 노력을 덜 치렀기 때문이라는 냉정한 계산입니다. 마이클 샌델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지적했듯, 이러한 문법은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굴욕을 남겨줄 뿐입니다.

이처럼 엄격한 공정성의 잣대는 결국 우리를 끊임없는 비교와 피로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누군가 나보다 적게 일하고도 같은 보상을 받는 것을 볼 때, 혹은 내가 증오하는 대상이 조건 없이 용서받는 것을 목격할 때 우리는 깊은 분노와 상실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매달리는 이 '공정함'의 이면에 더 크고 신비로운 생명의 원리, 즉 '은혜'가 있음을 역설합니다.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자, 내가 치르지 않은 대가를 받아 누리는 계산 불가능한 사랑입니다.

공정이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규칙이라면, 은혜는 메마른 삶의 자리에 호흡을 불어넣고 연약한 존재를 일으켜 세우는 생명의 원동력입니다. 자격과 공로를 따지는 팍팍한 세상의 문법을 넘어, 은혜라는 신비한 원리를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비교와 피로에서 벗어나 참된 평안과 상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새벽부터 일한 품꾼은 공정의 잣대로 은혜로운 포도원주인을 바라봅니다. 
분하고 화가납니다. 내가 더 많이 일했는데… 더 많이 받아야 하는데… 
나보다 훨씬 일을 적게 한 저 사람이 같은 보상을 받다니… 
저 사람이랑 나랑 같은 대우를 받다니…
그러니 주인에게 따져 묻습니다. 
그러나 새벽에 왔든 해지기 1시간 전에 왔던 동일한 임금을 약속받고 왔고 같은 임금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포도원 주인의 뜻이고 원래 약속이고 부당한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넉넉함과 후함이라는 은혜가 노력한 만큼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공정이라는 눈에 거슬릴뿐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시각을 바꾸어야 할까요? 누구의 마음이 변화되어야 할까요?
"우리는 이유를 원합니다. 저 사람들이 딱한 사정이 있었다는 설명 하나만 있어도 마음이 풀립니다. 그런데 주인은 끝까지 이유를 대지 않습니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 '내가 후하니까.' 그것이 전부입니다. 바로 여기가 은혜가 견디기 어려운 지점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자격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무가치한 이들에게도 생명을 베푸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언제즘 이해할 수 있을까요?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순위가 역전된다는 말일까요? 물론 하나님나라는 거꾸로된 나라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환대받고 부자들이 들어가기 어려운 나라입니다. 무가치하게 여겨지던 어린아이들이 주인공으로 환영받는 나라입니다.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으뜸이되는 나라입니다. 그런면에서 역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순위가 바뀌는 역전이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순위 바뀜이 아닙니다.

모두가 같은 것을 받습니다. 모두가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새벽에 온 품꾼이 화가 났던 것은 “우리를 똑같이 대우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된다는 말은 어찌보면 그런 줄세우기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나라에서는 먼저 들어오든 나중에 들어오든 순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 은혜 앞에 순서와 노력과 시간은 무의미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천국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 시인 고진하님의 시 제목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숫자에 갇혀삽니다. 성적으로 줄을 세우고, 그 성적으로 대학과 미래가 정해지기도 합니다. 노오력의 성과를 숫자로 받습니다. 성적, 키, 팔로워 수, 교인 수, 연봉 액수, 아파트 평수, 주식창의 액수들… 아라비아 숫자는 기호일 뿐이지만 우리는 그 숫자 때문에 희망을 품기도 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숫자가 우쭐거리게도 하고 주눅들게도 합니다. 그런데 아라비아 숫자가 힘을 못쓰는 일도 많습니다. 사람의 사람됨, 아름다움, 공감, 책임감, 우정, 사랑을 계량화할 수는 없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나라에는 그런 숫자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은혜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닐까요?

만물보다 먼저 계신 하나님이신 그분이 죄인의 모양으로 오셔서 죄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처음이신 분이 마지막이 되셨습니다. 
저주받은 자, 십자가에 달려죽은 자가 삼일만에 부활 해 온 우주의 통치자로 하늘 보좌 높이 앉으셨습니다. 마지막이신 그분이 처음이 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놀라운 이야기 안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처음과 마지막이 되십니다. 그 안에서 첫째, 꼴찌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니 숫자가 없는 나라에서 은혜의 지배아래 살아가는 맑은물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공정한 세상을 향해 일하되 은혜를 잊지 맙시다.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갑시다.

우리 주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모두에게 동일한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오늘도 내가 받은 복음을, 내가 누리는 은혜를 곁의 사람과 나누고, 아직 이 은혜를 모르는 이들에게 전하며 살아가는 맑은물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