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2026. 9. 26.
두 아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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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추석연휴 잘 보내셨나요? 가족들과 함께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냈길 바랍니다. 가정교회 모임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예수님을 반영하고 비추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나누기 전에 잠깐 나누어 볼까요? 요즘 나와 예수님의 관계는 어떤가요? 나는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고 있나요? 거리를 두고 있나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나요? 나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추구하고 그 길을 함께 걷고 있나요? 우리(가정교회 식구들)는 하나님을 향해 성장하고 성숙하는 과정에 있나요?
질문이 많지만 이 질문을 가지고 생각해보고, 서로 나눠보는 시간을 잠시 가지면 좋겠습니다.
수영에 관련된 책을 읽고, 유투브를 시청하고, 호흡법과 영법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직접 물에 들어가 수영을 하기 전까지는 수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에 들어갔지만 온 몸을 물에 맡기고 직접 수영을 하기 전까지는 수영이 아닙니다. 물에 있지만 걷기만 한다든지 물장구만 친다면 그것은 수영이 아닙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지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독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지 않으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걸음을 따라 걷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올바른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이 신앙이라는 여정에, 예수님이 가실 길 위에 어디즘에 위치해 있을까요?
몸따로 마음 따로 움직이고 있을까요? 마음은 원하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 상황일까요? 몸과 마음을 함께 그 길 위에 걷고 있을까요?
권위에 대한 질문.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종교 최고 권력자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와서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가?”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는가?
복음서가 결말 부분으로 갈 수록 예수님과 종교권력자들 사이의 긴장이 깊어져 갑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고 백성들은 환호하고 “다윗의 자손,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를 외칩니다. 종교권력자들은 긴장 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예수를 당장에라도 제거하고 싶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왔고,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의 경제체제를 뒤집어 엎습니다. 상인들을 내 쫓고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이 다음날 성전에 들어와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종교권력자들이 지키고왔고 누려왔던 모든 기반이 위협을 받고 있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메시지를 반박할 수 없으면 메신저를 공격하라고 했던가요? 예수님의 삶과 행동과 가르침은 군중들의 마음을 파고 들었고, 권위있는 말씀에 사람들은 모두 감탄했습니다. 성전에서의 난동도 성전의 질서를 바로 세우려는 행동으로 비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권력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체제를 위협하고 기득권과 자신들의 위치를 뒤흔드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가?”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는가? 어디서 시골 듣보잡이 와서 난동을 피우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는가! 자격도없고, 라이센스도 없고, 누구의 허가나 백도 없는 자가 질서를 깨뜨리고 있다고 몰아붙입니다.
대제사장직은 본래 특정 가문이 잇는 종신직이었습니다. 그러나 헤롯 대왕 때부터 이미 왕이 자기 뜻대로 임명하고 해임하기 시작했고, 주후 6년 유대가 로마의 직할 속주가 된 뒤로는 로마 총독이 직접 임명하고 해임했습니다. 가야바를 세운 것도 로마 총독이었습니다. 심지어 대제사장의 예복까지 로마가 요새에 보관해 두었다가 절기 때만 내주었습니다. 옷이 없으면 직무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니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라고 묻는 이들의 권한은, 로마의 임명장과 로마 창고에 보관된 예복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종교권력자들은 이런 권한을 취득하는 것, 소유하는 것, 자격을 얻는 것, 허가 받는 것, 기득권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라는 시골 청년의 말과 행동의 진실됨보다 그의 출신과 자격과 라인과 라이센스가 더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그의 메시지와 행동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출신과 자격과 라인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톰 라이트는 이 질문 아래에 훨씬 더 무거운 질문이 깔려 있다고 봅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한 마태복음』에서 지적하듯, 종교권력자들이 정말로 묻고 싶었던 것은 “그래서 당신이 메시아라는 말인가?”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전에 대한 권위는 메시아에게 속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수백 년간 제사장 가문이 관리해 온 가장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시골에서 올라온 한 젊은 교사가 그 크고 세련된 수도에 와서, 마치 그곳이 자기 집이라도 되는 듯이 행동했습니다. 상을 엎고, 매매를 멈추게 하고, 잠시 그곳을 장악했습니다. 대제사장보다 더 큰 권위로 성전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 곧 메시아뿐이었습니다.
종교권력자들은 정말 묻고 싶은 질문을 피하고 권한의 질문으로 회피하고 자격을 문제삼고 있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예수님의 질문에 “모르겠다.”고 답을 회피하듯, 메시아이신 예수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카르텔과 체제가 위협받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척, 입으로 하나님을 말하고 살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길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둘째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교적 전통과 관습을 지키고 살았지만 참된 신앙의 빛 앞에 자신을 비추기를 싫어 했습니다. 신앙의 겉모습은 갖추었지만 신앙의 삶과는 멀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예’라고 답했지만 삶은 ‘아니오’하며 살았습니다. 메시야의 빛 앞에 자신을 비추기를 거부하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오늘 기독교의 문제는 신앙과 삶의 분리입니다. 아는 것과 실천의 분리, 몸과 마음의 분리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지만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분이 가신 길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와닿는 설교에 고개를 끄덕이고 감동받습니다. 선명한 교리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삶이 동반되지 않습니다. 얕은 지식과 감동에 머물러 안주하고 영적인 자만에 빠집니다. 예수님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고백에 따르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나의 신앙, 나의 삶은 어떤가요? 신앙의 전통은 지키지만 예수님을 따라 걷는 삶과 거리가 있는건 아닌가요?
누구로 부터인가?
권위에 질문에 예수님은 질문으로 응수하십니다. “그렇다면 나도 한 가지를 묻겠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늘에서 입니까, 사람에게서 입니까? 이 말에 답하면 나도 답을 하겠습니다.”
종교권력자들은 허를 찔린 듯 바로 답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의논합니다. 종교권력자들의 내부회의록이 공개됩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말하면 ‘어째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요, 또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자니, 무리가 무섭소.”
세례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처형당했고, 민중은 그를 순교자로, 예언자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에게서라고 답을 하면 무리들의 거센 반발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종교권력자들의 두려움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론이었습니다. 이들의 대화와 걱정에는 진리에 대한 탐구와 고민이 없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묻는 진지함이 없습니다. 오로지 손익계산만 있습니다. 여기 서로 의논하다라는 단어는 셈하고 따진다는 뉘앙스가 강한 단어입니다.
종교적인 전통 안에 머물며 안주하며 살았던 종교권력가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음성과 이야기에 귀기울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면서 무리를 군중을 의식하며 두려워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묘한 줄타기를 하며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도모하는데에만 발빠른 삶을 살았습니다.
‘모르겠다’라는 답.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습니다. 모르겠다. 잘 기억이 안난다. 주로 정치인들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질문을 받을 때 많이 했던 답입니다. 모르겠다는 답속에 숨음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숨어버립니다. 그들은 이 대답속에 숨었다고 생각하지만 종교권력가들의 실상이 드러나고 비겁한 줄타기임이 나타납니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 전략적인 침묵. 모름으로 답하면서 진실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회피합니다.
두 아들 이야기
모르겠다며 대답을 회피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짧은 이야기를 전해주십니다.
포도원 주인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밭에 가서 일하라고 첫째와 둘째에게 말했는데 첫째는 처음에는 싫다고 말했다가 뒤에 뉘우치고 가서 일했다. 둘째는 아주 공손하게 예라고 답을 했지만 결국 가지 않았다.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했느냐?
오늘 우리 문화에서는 아버지가 시킨다고 다 해야되냐?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가부장적인 문화와 가족 단위가 생산공동체임을 감안한다면 아버지의 이런 요구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권위는 율법과 가족을 책임지고 지탱하는 면에서 아주 무겁고 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생산을 책임지는 가족 구성원으로 아버지의 요구를 거부한다는 것은 불효를 넘어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거부하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첫째의 거부는 아주 무례하고 무책임한 행동이었습니다. 어떻게 싫습니다라는 답이 나올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부합니다. 그리고 둘째의 공손하며 수용적인 태도와 아버지의 요구에 예라고 대답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명예와 체면을 중요시하는 근동문화에서 칭찬받아 마땅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결과가 달랐습니다. 첫째는 아버지 면전에서 ‘싫습니다’라며 답하고 거부한 것을 뉘우치고 나중에 포도원으로 가서 일했습니다. 둘째는 아버지 면전에서 아주 공손하게 ‘주님(아버님)’하며 아버지의 뜻을 따를 것 같았지만 포도원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마태에게 주님은 신앙고백적인 언어입니다. 지금 둘째 아들이 그 호칭을 아버지에게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누가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까? 당연히 첫째입니다. 우리의 답도, 그리고 종교권력자들의 답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대답은 곧 자기들에 대한 판결로 돌아옵니다. 즉 이들은 말로는 예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같지만 삶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습니다. 종교적 전통과 관습은 중요시했지만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는 무관심했습니다. 입술로는 주여, 주여 외쳤지만 삶은 주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요? 나는 첫째 아들에 가까울까요? 둘째 아들에 가까울까요? 나는 우리는 입술의 고백과 삶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 애쓰고 고뇌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요? 예수님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나의 모습을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뉘우침의 길
이야기 속 첫째 아들의 행동에서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29절 “뉘우치고”라는 단어입니다. 첫째 아들의 뉘우침은 감정적인 후회와 마음의 아픔을 넘어 행동으로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참된 뉘우침은 행동으로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회개. 회심의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에스겔서의 말씀은 “너희는 회개하고, 너희의 모든 범죄에서 떠나 돌이켜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 지금껏 걸어왔던 걸음을 돌이켜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신앙한다는 것은 그 교리에 동의하고 예배를 빠지지 않고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내는 것이며, 삶의 양식과 체질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지적인 고백을 넘어 삶의 방식의 완전한 전환입니다.
가끔씩 설교중에 경계사고, 중심사고, 여행사고에 대해 이야기한적이 있습니다. 경계사고 바운더리사고는 경계선을 분명히하고 그 경계 안에 있느냐 없느냐로 신앙을 평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교회에 출석하는지, 교리를 알고 동의하는지, 주일예배에 출석하고 교회봉사와 종교적 실천을 하는지를 가지고 신앙을 평가합니다. 경계가 주는 명료함과 안전함이 있지만 한계도 명확합니다. 경계가 분명하기에 배타적이며 더이상 중심이 되시는 예수에 대한 관심을 잃고, 결국 신앙을 전통과 관습으로 일치시켜 사유화합니다.
중심사고, 센터사고는 중심되시는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멀어지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중심이 되시는 예수님과의 관계와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신앙의 동기와 이유, 삶의 자세와 태도를 살핍니다. 경계사고보다 한걸음 나아간 신앙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가 계신지? 그 예수를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지를 묻고 살피고 관심을 가집니다.
여행사고, 순례사고는 중심되신 예수님도 가만히 센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걷고 있는가?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는지? 그 삶을 실천하고 살아내는지? 성품과 인격이 변화되고 성숙해가는지를 묻습니다. 신앙과 삶을 예수님을 따르는 여정으로 바라보며 지속적인 변화와 성숙을 지향하고 살아갑니다. 산티아고순례길에 인종이 다르고 신분과 나이와 성별이 다르지만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만으로 모두가 동반자가되고 친구가 되듯, 경계 안에 있든 없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예수의 길가는 사람으로 동반자적인 영성을 추구합니다.
단순화시키자면 경계사고는 교리와 전통을 중요시하는 신앙, 중심사고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신앙, 여행사고는 삶과 성품의 변화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두 아들은 모두 아버지의 집 안에 있었습니다. 둘 다 아들이고, 둘 다 경계 안입니다. 그런데 한 아들은 거칠게 거절하고도 포도원 쪽으로 방향을 바꿨고, 한 아들은 예의 바르게 대답하고도 제자리에 머물렀습니다. 경계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경계 밖에 있던 이들, 곧 세리와 창녀들이 지금 중심을 향해 걷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앞서 간다고 하셨습니다.
첫째 아들이 보인 뉘우침의 길을 살펴보며 오늘 우리가 마주해야할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향하고 있는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하는 빌립보서의 말씀이 나의 중심에 일어나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이 가신 걸음을 따르고 있는가? 나는 성품에서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는가? 삶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평화를 사랑하고 이웃을 환대하고 공동체 가족을 용납하고 사랑하고 있는가?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묻고 내 몸과 삶을 드리고 있는가?
이 물음들 앞에 지금 나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나의 신앙은 무엇을 추구하고 있나요?, 나의 걸음은 누구의(무엇의) 뒤를 따르고 있나요?
뒤집어진 하나님나라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의 비유를 마치신 후, 예수님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 둘 가운데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정답을 말합니다. “첫째 아들입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입으로 자신들을 정죄하는 판결문을 읽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1절에서 예수님은 당대 사회에 폭탄과도 같은 선언을 내리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아니! 성전을 지켜온 제사장들보다 거룩함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대제사장보다 그들이 보기에 매국노요 죄인인 세리가 먼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다니요! 빚과 생계에 내몰려 가장 낮은 자리로 떠밀린 여인들이 먼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다니요! 지금도 그렇지만 성매매는 대부분 생존에 내몰린 여성들의 마지막 선택지였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여기서 ‘먼저 들어간다’에 쓰인 그리스어 ‘프로아고(προάγω)’는 시제가 현재형입니다. “장차 들어갈 것이다”가 아니라, “지금 그들이 너희 앞을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충격적입니다. 어떻게 저런 천한 자들이 종교권력자들보다 먼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다니요! 그것도 현재형을 써서 지금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라니요!!!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역전이 일어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이런 극명한 차이를 만들어 내었을까요? 그것은 32절에 나옵니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옳은 길을 보여 주었으나,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았으며, 그를 믿지 않았다.”
뉘우침과 믿음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자격과 경력과 지위와 규칙준수에 있지 않습니다. 진리에 반응하는 마음, 옳은 길을 보고 뉘우칠 줄 아는 중심, 믿고 바라고 변화하는 삶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뉘우치고 믿는 자들에게 환하게 열려있는 나라입니다.
종교권력자들은 성전에 머물고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왔지만 결국 하나님나라에 밖에 있습니다. 그들은 뉘우치지 않고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메시야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주변부에 머물던 세리와 창녀들이 하나님나라에 먼저 들어갑니다. 이들은 세례요한의 회개하라는 외침에 가슴을 찢고 뉘우치며 반응합니다. 삶을 돌이키고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종교권력자들은 자신들의 도덕적인 성취와 외적인 경건을 방패로 삼는 종교성이 뉘우치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고 믿음으로 나아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뉘우침과 믿음의 길입니다. 지금 여기 임한 하나님나라를 경험하고 누리는 길은 뉘우치고 믿음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조금 전 마주해야 할 질문들 앞에 정직하게 반응할 줄 아는 마음, 옳은 길이 주어졌을 때 지금 여기에서 돌이키고 변화의 길로 들어서는 믿음, 그것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나의 오래된 신앙의 연수, 과거 한때 뜨거웠던 마음, 교리적 신념과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매일 예수님을 향하고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걷는 순례의 여정에 있는 사람들. 매일 회개와 회개의 열매를 맺어가는 사람들, 진리에 반응하는 이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말씀을 맺으며
성서일과의 에스겔 18장의 마지막 구절은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이렇게 전합니다.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가 죽는 것을 나는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겔 18:32)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하시는 것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주님의 유일한 관심은 우리가 돌이켜 ‘사는 것’입니다. 뉘우치고 믿음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맑은물 가족 여러분, 오늘 나의 존재와 삶의 자리에서 ‘예’라고 했지만 정작 ‘아니오’하며 사는 삶의 자리는 무엇입니까? ‘아니오’라고 말했지만 ‘예’하며 뉘우치고 돌이켜야 할 삶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오늘 우리의 귀에 “너희는 회개하고, 너희의 모든 범죄에서 떠나 돌이켜라.”는 주님의 음성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성령님의 음성이 울려퍼지길 바랍니다. “야훼여, 당신의 길을 가리켜주시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주소서.”라는 겸손한 기도가 우리의 기도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