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아들, 버린 돌, 모퉁이 돌

설교

2026. 10. 3.

아들, 버린 돌, 모퉁이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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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창세기 3장은 반복되는가?

오늘 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겹쳐지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에덴동산의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동산을 지으셨습니다. 나무를 자라게 하시고, 강이 흘러 동산을 적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그곳에 두시고 "맡아서 돌보게" 하셨습니다(창 2:15). 동산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이었고, 사람은 그 동산을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해 다스리는 청지기였습니다. 그런데 뱀이 속삭였습니다. "그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사람은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맡은 사람이, 청지기가 주인이 되고 싶어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정성스럽게 가꾸신 창조세계를 감사로 누리는 대신, 그것을 움켜쥐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했습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바로 그 동산에서 반역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포도원 이야기도 똑같이 시작합니다. 주인은 포도원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멀리 떠났습니다. 포도원은 주인의 것이었고, 농부들은 그것을 맡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열매를 거둘 때가 되어 주인이 종들을 보내자, 농부들은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습니다. 주인이 더 많은 종들을 보냈지만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침내 주인은 "그들이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하며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아들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상속자다. 그를 죽이고, 그의 유산을 우리가 차지하자." 그들은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이 자기 것이 될 줄 알았습니다. 맡은 자가 주인 행세를 하고, 끝내 주인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 것입니다.

에덴과 포도원

에덴동산과 포도원은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 스스로를 앉히려 합니다. 죄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앉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 죄는 무엇보다 관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시지 않으려는 마음,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밀어내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멀어낸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움켜쥡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신 생명, 시간, 재능, 관계, 땅을 감사로 받는 대신 ‘내것’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정해 주신 경계였지만, 아담과 하와는 그 사랑의 경계를 차지해야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포도원 농부들에게 주인의 포도원은 맡아서 관리 해야할 곳이 아니라 빼앗아야 할 유산이 되어버렸습니다. 움켜쥔 손은 더 이상 받을 수도, 나눌 수도 없습니다. 움켜쥠은 죄의 하나의 모습입니다. 움켜쥠은 비극의 이야기로 슬픈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교회는 이런 죄를 “자기 안으로 굽은 마음”으로 불러왔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시작되어 마틴 루터가 죄를 “인쿠르바투스 인세(incurvatus in se)” 곧 자기 안으로 굽은 존재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죄는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안으로 굽어진 존재가 온전하게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본래 사랑은 관계적이고 바깥을 향합니다. 타자를 향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열리고, 이웃을 향해 나아가고, 세상을 품습니다. 그런데 굽은 사랑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깁니다. 하나님도, 이웃도, 세상도 내 필요와 내 욕망과 내 두려움을 채우는 도구가 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굽어진 사랑은 자기 스스로도 왜곡된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죄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시기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열심조차 자기 의를 세우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굽은 사랑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 자신에게 가닿지 못합니다.

굽은 사랑은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가장 먼저 드러납니다. 성경의 첫 살인은 낯선 원수 사이가 아니라 형제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것을 견디지 못했고, 그 시기는 들판에서 동생을 죽이는 폭력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가장 사랑해야 할 가족 안에서 오해하고 다툽니다. 함께 신앙의 길을 걷는 공동체 안에서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나와 다른 사람을 싫어하고 거리두기하고 혐오합니다. 자기 안으로 굽은 마음에는 타자가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은 나의 상실처럼 느껴지고, 다른 사람의 다름은 나에 대한 위협처럼 느껴집니다.

더 놀라운 것은, 자기 안으로 굽은 사랑은 자기 자신조차 온전하게 사랑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에게만 몰두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굽은 마음은 한쪽으로는 자기를 부풀리고, 다른 쪽으로는 자기를 끝없이 미워합니다. 남보다 앞서야 안심하고, 남보다 뒤처지면 견디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증명하고, 인정받으려 애씁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 존재로 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굽은 사랑은 하나님이 맡겨 주신 피조세계마저 망가뜨립니다. 인간의 죄는 인간에게서 끝나지 않고 땅으로 번집니다. 이사야는 정의를 버린 백성의 포도원이 가시덤불과 찔레가 자라는 황무지가 될 것이라고 노래했고(사 5:6), 호세아는 진실도 사랑도 없는 땅이 탄식하고 들짐승과 새와 물고기까지 죽어 간다고 고발했습니다(호 4:1-3). 바울은 온 피조물이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롬 8:22). 맡겨진 땅을 내 것으로 움켜쥐고, 더 많이 갖기 위해 착취하고, 다음 세대의 몫까지 끌어다 쓰는 탐욕은 포도원 농부들의 탐욕과 다르지 않습니다.

창조절을 지나는 오늘, 우리는 이 죄의 결과를 마주하며 살고 있습니다. 해마다 기록을 갈아치우는 폭염과 폭우 앞에서, 가까운 사람과도 마음을 나누지 못하는 깊은 외로움 앞에서, 나와 다른 사람을 향해 쏟아지는 혐오의 언어 앞에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세상은 왜 이렇게 부서졌는가? 우리는 왜 이렇게 깨어졌는가? 성경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것을 움켜쥐고, 사랑이 자기 안으로 굽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그 이야기가, 포도원에서 되풀이된 그 이야기가, 오늘 우리 삶과 우리 교회와 우리 땅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비유가 향한 사람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려주고 계시나요? 이 비유는 앞선 두 아들의 비유에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45절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의 비유를 듣고서, 자기들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임을 알아챘다"(45절). 이 비유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가장 가까이 있고, 가장 열심히 섬긴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오시자마자 성전의 상을 뒤엎으시며 외치셨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구나"(21:13). 성전을 장악한 대제사장 가문들은 제물 거래와 성전세로 부를 쌓았습니다.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는 대제사장들이 종들을 보내 가난한 제사장들의 십일조를 강제로 빼앗았다고 기록합니다. 후대 랍비 문헌에는 대제사장 가문의 종들이 몽둥이로 백성을 때린다는 백성의 탄식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주인의 종들을 때린 포도원 농부들의 이야기가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생생하게 들렸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것을 움켜쥐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꼼꼼히 바치면서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인 정의와 자비와 신의는 버렸다"(23:23)고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말씀을 해석하는 권위를 움켜쥐고, 누가 하나님께 가깝고 먼지를 스스로 정했습니다. 성속을 구분하고,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고 사람들을 배제하고 혐오했습니다. 이사야의 노래 그대로였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기다리셨지만 보이는 것은 살육뿐이었고, 정의를 기다리셨지만 들리는 것은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었습니다(사 5:7).

종교가 사유화될 때

하나님의 것이 우리의 것이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의 이름이 권력의 도구가 됩니다.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만들어 휘두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됩니다. 그리고 폭력이 거룩한 일로 포장됩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죽이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를 처단한다고 믿었습니다. 가장 잔혹한 일은 악한 의도보다 거룩하다고 믿는 열심에서 나올 때가 많습니다.

교회의 역사가 이를 아프게 증언합니다. 십자군은 십자가를 앞세우고 예루살렘 주민들을 학살했습니다. 노예 제도를 옹호한 이들은 성경 구절로 그것을 정당화했습니다. 1994년 르완다에서는 피난처를 찾아 교회로 모여든 사람들이 그 교회 안에서 학살당했습니다. 제주 4.3사건의 다수이었던 서북청년단은 월남한 개신교 청년들 특히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치적 적대를 거룩한 싸움으로 만드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태 공동체에게 주는 경고

마태는 이 비유를 자기 공동체를 향한 경고로 들려주었습니다. 같은 비유를 말하는 마가복음에서 포도원은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가지만, 마태는 조건을 붙입니다.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민족”(43절)이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새로 포도원을 맡은 사람들도 열매로 평가받는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주인이 떠난 사이 "동료 종들을 때리는" 악한 종의 비유(24:48-49)로 같은 경고를 반복하고, 바리새파를 비판하는 한가운데서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의 선생은 한 분뿐이요, 너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23:8). 마태는 종교권력자들을 향한 심판의 말씀을 곧 교회를 비추는 거울로 경고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는 경고

이 비유는 교회를 향한 경고이면서, 동시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경고입니다. 포도원 농부들의 착각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 착각은 "내 것"이라는 말에서 시작됩니다.

나의 생명, 나의 시간, 나의 재능, 나의 관계, 나의 삶.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 모든 것 앞에 "나의"라는 말을 붙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말합니다. "땅과 거기에 가득 찬 것이 모두 주님의 것"(시 24:1)입니다. 바울은 묻습니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고전 4:7) 내가 선택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 숨 한 번, 내 하루 한 날도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었다고 여기는 재능도 처음에는 거저 받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내 삶을 내가 꾸려 가는 것 같을 때, 맡겨진 것이 슬그머니 내 것이 됩니다. 그리고 내 것이 된 삶에는 열매를 돌려드릴 주인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밀어내면 “나의”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신앙이 은혜를 잃어버리고 기준과 전통을 지키는 것으로만 전락하면 그것이 타자를 향한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폭력은 칼이 아니라 말로, 배제로, 혐오로 나타납니다. 신앙의 기준으로 누군가를 정죄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누군가를 공동체 밖으로 밀어낼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를 섬기고 있는가? 공동체에 대한 이상이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자시자신까지 파괴합니다. 나와 너 사이에 계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사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잃어버립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잃어버리면 정죄하고 비난하고 사람을 밀쳐냅니다.

나의 이야기로 읽기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을 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처음에는 아주 바른 판결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이 "포도원 주인이 돌아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습니다. "그 악한 자들을 가차없이 죽이고, 제 때에 소출을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41절).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누구보다 정의롭습니다.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히 보고, 마땅한 벌이 무엇인지도 분명히 압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 속 농부가 바로 자기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그들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악한 농부를 가차 없이 심판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 이야기를 들려준 분을 잡으려 했습니다(46절). 그들이 내린 판결은 정확했지만, 그 판결을 자기에게 적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말씀이 거울이 되어 자신들을 비추자, 그들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깨뜨리려 했습니다.

여기에 오늘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 본문을 읽으면서 쉽게 말합니다. "저 대제사장들, 저 바리새인들 같으니라고." 성전을 사유화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짓밟은 종교 지도자들을 손쉽게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읽는 순간, 우리는 41절의 대제사장들과 똑같은 자리에 서게 됩니다. 남의 이야기에는 정의롭지만, 정작 내 이야기는 보지 못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내 안에 포도원 농부 같은 모습은 없는가? 하나님을 밀어내고 내가 움켜쥐려 하는 삶의 자리는 없는가?

그 자리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자녀를 하나님이 맡기신 생명이 아니라 내 뜻대로 빚어야 할 내 소유로 여기기도 합니다.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함부로 행합니다. 직장에서 우리는 성과와 지위를 지키기 위해 동료를 경쟁자로만 보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도 우리는 오래 맡아 온 자리, 익숙한 방식, "우리 교회"라는 말 속에 하나님의 포도원을 슬그머니 우리 것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때로 우리가 가장 단단히 움켜쥐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내가 옳다"는 확신입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신앙의 방식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움켜쥔 손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따라옵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잃을 것도 많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농부들에게 주인이 보낸 종들은 반가운 손님이 아니라 자기들의 것을 빼앗으러 온 위협이었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으려 하면서 "무리들이 무서워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46절). 움켜쥔 사람은 늘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쉽게 비난이 되고, 비난은 폭력이 됩니다.

우리 삶에서 그 폭력은 날 선 말로 사람을 찌릅니다. 뒤에서 하는 말로 누군가의 이름을 무너뜨립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대화에서, 모임에서, 마음에서 조용히 밀어냅니다. 내 자리를 위협하는 것 같은 사람을 깎아내리고, 내 확신을 흔드는 목소리를 악하다고 단정합니다. 그 모든 순간마다 우리는 포도원 농부들이 종들을 때리고 쫓아낸 그 일을 작은 모양으로 되풀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우리 삶의 자리를 살펴야 합니다. 나를 살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가? 그 두려움 때문에 누구를 비난하고 있는가? 내가 지키려고 애쓰는 그것은 정말 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잠시 맡기신 것인가? 이 질문들이 불편하다면, 그것은 말씀이 나를 읽기 시작했다는 표시입니다. 대제사장들은 그 불편함 앞에서 말씀하시는 분을 밀어냈습니다. 우리는 그 불편함 앞에서 다르게 응답할 수 있습니다. 거울을 깨뜨리는 대신, 거울 속의 나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주님 앞에 내어놓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바로 그 농부입니다.” 찾아오시는 그 아들 앞에 온전히 반응하는 것입니다. 

모퉁잇돌 예수

예수님은 자신이 들려주신 이야기 안에서 장차 일어날 일을 예고하셨습니다.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이 농부들의 손에 붙잡혀 포도원 밖으로 쫓겨나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곧바로 시편의 말씀을 꺼내 결정적인 반전을 선언하셨습니다. "집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라운 일이다."

아들과 돌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으면 아들은 "벤"이고, 돌은 "에벤"입니다. 포도원 밖으로 쫓겨나 죽임당한 아들(벤)이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에벤)이 되고, 바로 그 돌이 머릿돌이 됩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성경을 따져 보고 그분을 불합격시켰고, 세상의 권력은 그분을 성 밖에서 처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십자가의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 나라 전체를 떠받치는 가장 단단하고 존귀한 모퉁잇돌로 세우셨습니다. 사람들의 판결은 십자가였지만, 하나님의 판결은 부활이었습니다.

그리고 버려진 아들을 통해 열린 하나님 나라는 뜻밖의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바로 앞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21:31).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아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에게 주실 것이다"(43절). 하나님의 것을 움켜쥐고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사람은 결국 그 나라를 잃습니다. 그것이 이천 년 전의 대제사장이든, 오늘의 교회든, 이 자리에 앉은 우리 자신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움켜쥔 손을 펴고 그 돌 앞에 엎드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나라를 선물로 받습니다.

그 나라의 열매는 우리가 애써 만들어 내는 업적이 아닙니다. 자기 안으로 굽어 있던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펴 주실 때 맺히는 열매입니다.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다시 삶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 그래서 움켜쥐던 손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을 포도나무로 제자들을 가지로 비유하시며 자신 안에(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도나무를 벗어난 가지, 예수를 벗어난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움켜쥔 사람들은 그저 아무짝에 쓸모없는 건축자들의 버린돌로 예수님을 취급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굽어진 존재임을 아는 사람들, 내가 바로 그 농부임을 깨닫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 나에게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에게 이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굽은 허리를 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열심히 노력해도, 더 많이 알아도, 더 오래 교회를 다녀도, 자기 안으로 굽은 마음은 스스로 펴지지 않습니다. 오늘 비유 속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증거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성경을 많이 알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섬겼지만, 그 앎과 열심이 그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앎과 열심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밀어냈습니다. 우리를 펴 주실 수 있는 분은 우리 바깥에서 오신 분, 우리가 버린 그 돌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우리에게 이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움켜쥔 손으로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셨지만 그것을 움켜쥐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상속자이셨지만 유산을 지키려 하지 않으시고 자기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머릿돌이 되실 때, 우리 삶의 기준이 바뀝니다. 무엇을 더 가질까가 아니라 무엇을 돌려드릴까를 묻게 됩니다. 누구를 이길까가 아니라 누구를 품을까를 묻게 됩니다. 움켜쥐던 손이 펴지고, 그 손으로 비로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 가정에도, 우리 교회에도, 신음하는 이 땅에도 이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를 밀어내고, 하나님이 맡기신 것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세상에서, 버려지셨으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만이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시편 기자와 함께 기도합니다. "만군의 야훼여, 우리를 다시 일으키소서. 당신의 밝은 얼굴 보여주시면 우리가 살아나리이다"(시 80:7). 주님, 제가 바로 그 농부였습니다. 주님의 것을 제 것으로 움켜쥐었습니다. 이제 그 손을 펴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버려진 돌이신 주님을 제 삶의 머릿돌로 모십니다. 굽은 저를 펴 주시고, 주님 안에 머물러 열매 맺는 가지가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