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황제의 것, 하나님의 것

설교

2026. 10. 18.

황제의 것, 하나님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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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on

누가 참된 주인인가?

이번주 성서일과의 말씀은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분명하게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왕이시며, 모든 신 위에 뛰어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특정, 종교나 민족의 울타리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기독교만의, 이스라엘 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세상을 지배하던 이방의 왕까지도 도구로 만드시며 온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유일한 주권자이십니다. 
허무한 우상과는 달리 세상을 창조하고 정의과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진정한 왕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만의 좁은 울타리와 편견을 넘어, 온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앞에 겸손히 엎드립니다. 다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지만 그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 답게, 하나님의 뜻과 나라가 임하길 소망하고 살아야겠습니다. 

덫

예수님은 백성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권력가들의 눈에 예수님은 눈에 가시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포도원 품군 이야기, 두 아들 이야기, 악한 포도원 품군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비유의 이야기들은 그들의 거짓과 위선을 폭로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종교권력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긴장은 점점 깊어지고 어떻게든 예수님을 얽어매어서 제거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던 중, 바리새인들은 꾀를 냅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릴 묘수를 생각해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한 수 배우는 척 연기를 하며 예수님을 걸려넘어질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면에서 얍삽하면서 비열하고 섬뜩한 모습을 봅니다. 
하나는 바리새인들이 헤롯당원과 야합하는 광경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 와서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늘어놓는 그들의 속내입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전혀 다른 이념과 방향성을 가지고 있던 집단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거룩을 추구하며 분리되어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반로마적이었습니다. 반면 헤롯당원들은 로마의 권력에 기생해서 살아야 했기에 친로마적이며 신앙에서도 타협을 잘하는 집단이었습니다. 평소라면 서로를 비난하며 결코 함께하지 않을 두 무리가 한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해 야합합니다. 
이 일은 바리새인들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기에 신앙의 순결을 위해 분리를 강조하던 그들이 상종하기 싫은 이들과 야합하는 모습에서 더욱 그들의 위선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세웠던 전략을 살펴보면 이들의 얍삽함과 비열함이 더 분명해집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직접 나서지 않습니다. 한발 물러서서 제자들을 보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듣는 형식을 통해 당시 자연스러웠던 묻고 답하는 형식의 배움의 틀을 가져옵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릴 완벽한 틀을 짰습니다. 
이들은 던진 질문은 빠져나올 수 없는 덫이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라고 말하면 민중이 선지자로 여겼던 예수님이 친로마성향을 보인다고 하여 백성들의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예수님으로 향하던 시선과 마음이 식을 것입니다. 반면 “옳지 않다”라고 말하면 로마에 저항한다하여 반역자로 잡혀갈 것입니다. 그래서 친로마 성향을 보이는 헤롯당원들이 필요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이지 않고 헤롯당원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제거하려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께 하는 칭찬을 보십시오.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겉으로 듣기에는 정말로 예수님을 선생으로 인정하며 구도자로서 선생에게 답을 듣기 위해 겸손하게 묻는 것 같지만 정반대였습니다. 
아마도 바리새인 랍비가 제자들에게 직접 써주고 암기하게 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옳지 않다”라는 답이 나오도록 유도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 된 칭찬인 것 같습니다. 
“당신은 진실되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분이지요! 그렇다면 아무리 어려운 질문이라도 사람 눈치 보지 말고 당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시오!”

사람이 이렇게 얍삽하고 비열하고 계산적이고 위선적일 수 있을까요? 이런 사람을 직접 마주한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눈 앞에 보이는 이익과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을 이용해먹고, 위선적이고 비열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런 바리새인의 모습을 보면서 때로 우리 내면에 숨겨진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양면성이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나 자신의 유익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이용하거나 겉과 속이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지 않는지 점검하며 정직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서기를 바랍니다. 
이길승님의 우리의 기도라는 찬양이 생각납니다. 
(당신의 겸손함, 당신의 거룩함, 당신의 정직함 우리에게 보이사
내 안에 교만함, 내 안에 천박함, 내 안에 거짓됨 모두 벗어버리고
어린 양 예수 따라가는 무리 되게 하소서)

세금 이슈!

세금문제를 조금 더 살펴봅시다. 세금을 내고 말고가 어떻게 덫이 되는지? 왜 그토록 곤란하고 난감한 질문이었는지 자세히 살펴봅시다.

분봉왕 헤롯을 통해 다스리던 시대에는 큰 소요는 없었습니다. 로마의 속국이기는 하나 이스라엘의 나라를 인정하고 있었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네 유대나라 이스라엘에 세금을 내는 것이기에 큰 갈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헤롯의 아들 아킬라오가 폭정으로 폐위되자, 로마는 유대를 로마 시리아의 행정주에 속한 직속 행정구역으로 전환하고 로마에서 직접 총독을 보내 다스렸습니다. 이때 시리아 총독 구레뇨가 인두세를 부과하기 위해 유대 전역에 인구조사(호적조사)를 실시하자, 이에 반발한 갈릴리 출신 유다와 바리새인 사독이 민중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유다와 사독의 반란은 단순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바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이스라엘에게 로마의 황제는 신격화되었고 그것이 동전에까지 새겨져 있어 세금을 내는 것은 우상숭배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민족적 정체성과 신앙의 정체성을 뿌리채 흔들어 놓는 심각한 도전이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강점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되었던 신사참배와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고, 로마의 잔혹한 보복이 뒤따랐습니다. 반란에 가담했던 이들은 십자가에 달려서 거리에 전시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세금 이슈는 민족과 신앙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주제이고, 과거 아픈 역사를 가지는 트라우마였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세금이슈로 예수님을 덫에 놓은 것은 무척이나 치밀하고 악의적인 술수였습니다. 신앙의 양심을 지키며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 “옳지 않다”를 선택하면 로마의 칼날이 예수님에게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옳다”라고 답하는 순간 현실과 타협하며 신앙의 양심과 하나님을 저버린 민중의 배신자로 낙인 찍힐 것입니다. 세금 이슈는 어떤 답을 하더라도 외통수에 걸릴 수 밖에 없는, 그들이 간교하게 짜놓은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교묘하게 아주 철저하게 계산된 덫으로 예수님을 유인했지만 예수님은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마치 몰래카메라로 속이려 했는데 몰래 카메라의 몰래카메라 처럼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위선과 간악함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바리새인의 제자들의 말대로 진실하고 사람의 겉모습에 흔들리지 않으신 분이시기에 그들이 속마음을 아시고,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종종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사람의 의도와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때때로 종교 권력자들의 숨겨둔 위선과 계산을 드러내어 부끄럽게 합니다. 반면에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지만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의 진심과 상처를 이미 알고 계시기에 깊은 위로와 평안을 줍니다.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간악한 생각, 위선자, 시험. 바리새인들의 속마음이 들통납니다. 그들의 마음의 소리를 예수님은 아시고 꾸짖으십니다. 이들은 움찍했을까요? “옳지 않다.”라는 답을 유도하고 그 말을 기다렸는데 역으로 자신들의 속마음이 드러나니 더 감추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달라.” 그러자 바리새인들 중에 한 사람이 데나리온 하나를 예수님께 건네줍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예수님의 주특기이지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시는…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그러자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라고 그들이 답을 합니다.

로마가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하여 은으로 주조한 공식화폐인 데나리온 한 면에는 월계관을 쓴 황제의 흉상이 양각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아우구스투스의 존엄한 아들 티베리우스 황제"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다른 면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황후이자 티베리우스의 어머니인 리비아가 신들의 보좌에 앉아 있는 모습을 양각하고는 "최고의 사제"라고 새겨놓았습니다.

그러니 누가 뭐라해도 그 돈은 황제의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답이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얼핏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제기한 함정 질문을 교묘하게 피해가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피해간 것이 아니라 함정 질문을 역으로 되치기 한 셈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행동과 물음 그리고 답을 통해 바리새인들의 간교함과 위선을 드러내고, 바리새인들도 이미 황제의 질서에 갇혀 살고 있음을 폭로하고 황제의 질서보다 더 큰 질서가 있음을 밝히드러내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말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황제 VS. 하나님

예수님은 황제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황제와 하나님을 나란히 놓고 이야기하는 것인 불편하기는 하지만, 예수님은 황제와 하나님을 구분하고 나란히 놓는 것을 통해 황제는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로마를 통일했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가장 존귀한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주’, ‘평화의 왕’, ‘구원자’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도 스스로를 신으로 여겼습니다. 구원을 가져다 줄, 평화를 지켜줄, 온 세상의 주로 신의 아들로 숭배하고 따를 것을 강요했습니다. 황제가 신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반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황제는 황제일뿐 신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십니다.

황제는 신이 아니라 사람일뿐입니다. 그가 천하를 호령하고 지배하고 다스릴지 몰라도 사람에 지나지 않으며,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성서일과의 이사야서에도 나타나듯 하나님 앞에 이방의 황제들은 하나님이 부리시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황제는 권력을 쥐었을 뿐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시며,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신처럼, 우상이 된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생명을 주는 것 같고, 구원을 베푸는 것 같고, 평화를 주는 것 같은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의 시간과 열정과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오늘 우리 시대에 가장 강렬한 신이자 우상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돈과 물질. 맘몬’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약속하는 안정과 통제력입니다. 우리는 더이상 돌이나 나무나 권력자에게 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돈과 성공, 스펙과 권력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황제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열정과 사랑을 쏟아 놓습니다. 돈이 마치 우리에게 삶의 안전을 보장하고, 미래의 불안으로부터 구원해 주며,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 해줄 수 있는 전능한 신처럼 여겨집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돈을 더 추구합니다. 돈은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합니다.

동전에 신의 아들이라고 새겨진 황제가 신이 아니라 황제에 불과하듯, 세상의 유한 한 것들은 결코 우리의 구원자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돈과 명예, 타인의 인정,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은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만족과 영원한 평화를 선물하시는 분은 오직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습니다. 성서일과의 시편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며 그분을 예배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사람은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예배합니다. 예배하는 대상으로부터 만족을 얻으려하고 구원을 얻으려하고 평화를 얻으려 합니다. 우리가 참된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은 신이 아님을 압니다. 모든 것이 상대화됩니다. 돈에서, 염려에서, 자기만족에서, 다른 사람의 인정에서 자유케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요, 기쁨이요, 구원이 됩니다.

혹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예배하고 추구하며 그것에 충성을 보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만방의 모든 신은 헛된 우상이니 오직 하늘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맑은물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하나님 안에 있는 영광, 부요함, 기쁨, 만족, 평화를 맛보는 맑은물이기를 바랍니다. 돈 걱정, 자녀 걱정, 미래의 염려, 자기만족과 비교와 인정으로부터 참된 자유를 맛보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맑은물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충성의 대상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한가지 더 발견할 수 있는 의미는 이 말이 바리새인들을 향한 무언의 질문이거나 책망입니다.
“겉으로는 로마의 지배를 거절하는 척 하지만 실상은 로마에 순응하고 있지 않느냐?
황제의 것은 잘도 돌려드리면서 너희는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할 것을 돌려드리고 있느냐?
너희들이 정말로 충성을 바치는 대상이 누구냐?
정말로 하나님이냐? 황제 아니냐? 너희 자신이 아니냐?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도 헛된 우상 황제에게 바치고 있는 것이 아니냐?”라고 물으시며 책망하시는 것 같습니다.

터툴리안 때부터 이본문을 해석할 때,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과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사람을 대조하며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사람은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고 해석해왔습니다. 숨어있는 문장, 괄호 처리된 내용이지요.

결국 예수님은 “동전에 새겨진 황제의 형상은 황제에게 줄지언정,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너희 자신(사람)은 온전히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사람됨은 자기 자신을 삶의 원주인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데 있습니다. 사람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충성해야할 대상을 잃어버린 채 세상의 가치에 얽매여 살아갈 때, 우리의 영혼은 방향을 잃고 삶은 본래의 빛과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인 우리가 동전 몇 닢과 세상의 인정, 허망한 자기만족과 권력 앞에 엎드려 그것을 구원자로 삼는 것만큼 서글픈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손에 쥔 데나리온의 형상에 집착하지 말고 우리 영혼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우리의 전 존재, 우리의 전 인격, 우리의 온 삶을 드려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우리는 세상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우리가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충성은 무엇(누구)를 향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며 살았던 사람들이 성경에 가득합니다.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는 태어난 사내 아이를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을 어깁니다.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의 권력 앞에서 생명을 존중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아난 아이가 모세입니다.

모두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갔던 암흑과도 같은 사사시대에 별처럼 반짝반짝 빛난 두 사람이 있습니다. 몰락한 가문 나오미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한 룻은 척박한 삶의 자리에서도 어머니 나오미의 곁을 지키고 신실하게 삶을 살아갑니다. 부자였던 보아스는 자기만족과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청지기로 하나님의 은혜를 차별없이 흘려보내는 헤세드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죽음의 문화에서 생명을 추구하고 생명을 살려냅니다. 모두가 자기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시대에 누군가의 곁을 지키고 하나님의 은혜와 흘려보내며 삽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니다.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이 밀려 오시만 참된 왕이신, 참된 구원자이신, 참된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오늘의 삶을 신실하게 살아갑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갔던 데살로니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지니고 살았습니다.

전 존재로, 온 삶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삶을 사는 맑은물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추구하고 열망합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우리의 삶을 눈치보지 말고, 주눅들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진실하게 당당하게 살아갑시다. 나를 우리를 하나님께 돌려드림으로 우리의 삶에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드러나고 나타나길 기도합니다.